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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북 May 22. 2023

아빠의 위대한 유산

참 좋은 거 주셨네 그래!!


유전병이라고요?


맙소사.



하얗고 조용한 내과 진료실에 앉아 진료 결과를 듣고 있던 나는 의사의 마지막 말에 기함을 금치 못했다.

아빠의 삶에 뭐 대단한 반전이 있을 거라 기대한 적은 없다. 뭐 예를 들면 나 모르게 사둔 서울 근교의 알짜배기 땅이라든지, 몇억이 들어있는 비밀통장이라든지, 보물창고 지도라든지, 비트코인 암호라든지 그런 것 말이다. 

그러나 아빠가 남긴 것은, 우리가 결혼 후 달에 한 번씩 드렸던 용돈. 그중에서 생활비와 관리비 등을 빼고 남은 돈을 모아둔 게 전부였다. 그것을 유산이라 말할 수 있는가. 남겨주지 않았어도 서운하지 않을 돈이었으며 이 돈에는 구질한 히스토리까지 있다.





아빠를 병원에 모신 후 가장 먼저 한 것은 집에 들러 아빠가 숨겨둔 현금봉투를 찾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빈집이 될 테니 돈부터 찾아오라는 엄마들의(시엄마+우리 엄마) 성화가 극성이었기 때문이다.

남편과 손을 걷어붙이고 여기저기를 뒤져대자 이내 하얗고 꼬깃한 봉투들이 서랍 구석구석에서 나왔다. 겹겹이 개켜진 빤스 사이에서 마지막 봉투를 꺼내 액수를 정산했을 때 나는 ‘심봤다’가 아닌 ‘젠장’을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돈으로 맛난 거나 사 잡수지.

일주일마다 오라고 닦달해서 집에 불러들였으면 우리들 저녁밥이나 좀 턱턱 사주지.

한 번쯤은 사위 생일날 동대문표 도매옷 말고 백화점 가서 브랜드 옷 한 벌 질러주지.

철철이 좋은 곳 모시고 가서 좋은 구경 시켜드리면 우리 안서방 고맙다고 용돈이나 근사하게 쏴주지.


'대체 뭐 좋은 소리 듣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꼬불쳐둔 거야? 성질나게..'


스물다섯 살부터 서른 살 결혼 전까지 아빠에게 다달이 50만 원씩의 용돈을 드렸다.

돈을 많이 버는 직업도 아니었고 속으론 수지 타산이 안 맞는다 생각했지만 

‘절절한 효녀 코스프레’라도 해야 그나마도 정상적인 가정으로 보이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에 노력한 것이

‘결혼하면 사위도 자식인데 너 50, 사위 50 도합 100은 줘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기적의 논리로 돌아왔을 땐 끝없이 절망스러웠고 아빠 옷자락을 잡아끌며 “나 같은 게 결혼을 해서 뭐 하냐, 그냥 여기서 뛰어내리자, 아빠랑 나랑 같이 죽자” 하며 베란다에서 전쟁 아닌 전쟁을 했다. 그 비참하고 비루한 사투 끝에 아빠는 기어코 우리에게서 100만 원을 쟁취했다.


남편이 만신창이가 된 내 몰골을 보고 한숨을 푹 쉬며

“적금 붓는다고 생각하자. 나 아버님한테 50만 원 정도는 드릴 수 있어.”라며 받아들인 것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아빠는 본인의 옷가게에 관련된 게 아니면 지출을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생계가 아닌 취미로 하고 있으니 문제지만. 

결혼 1년 후 느지막이 떠난 신혼여행 출발 전날, 우리를 집으로 부르더니 여행 가서 보태 쓰라며 본인의 비상금 봉투를 턱 내놨을 땐 그래. 아빠에게도 큰 그림이 있었구나. 하며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러나 그 후로는 점점 스크루지 영감처럼 인색해졌으며, 이쯤에서 한턱 내줬으면 좋겠는데. 하는 타이밍이 되어도 귀신같이 지갑을 꾹 닫고, 언젠가 내가 모은 돈으로 벤츠를 사주마.라는 (30만 킬로 정도 달린 죽기 직전 벤츠라면 가능할지도.) 허세를 부려댔기에 이놈의 돈 봉투는 나에게 있어 아빠의 고집스러움과, 쪽팔림, 막막한 부채감의 근원이었다. 또 치사스럽지만 엄밀히 이 돈의 기원을 따져보자면 아빠가 아닌 나와 내 남편의 땀 섞인 노동의 대가 아니던가. 그러니 딱히 쾌재를 외칠 횡재돈도 아닌 것이다.

아빠가 살던 집의 계약금은 아빠가 걸쇠를 잠근 채 하도 119 구급 대원을 불러댄 통에 이중샷시를 깨 부셔놔서 뭐 남아있을 것 같지도 않고 형제도 없으니 정리할 것도 없다. 심플 그 자체다. 


그러니 결국 아빠가 나에게 남긴 유산은 처량하기 이를 데 없는 흰 봉투들 뿐이고 나 또한 더 있을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그런 내가 이토록 황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의사에게서 내가 가지고 있는 병이 “유전병”이란 것이다. 이게 말이 되냐고요.




아빠의 위대한 유산



아빠가 입원하고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차 정도 되었을 때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동안 큰 이슈도 없었고, 일체의 전화도 없었다.'쫓아내지 않는구나’라는 안심이 들자, 점차 안정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불안의 침전물이 가라앉아 고요해진 마음을 ‘온전한 평화’라고 칭하긴 다소 어려운 점이 있었다.


조그마한 외부 자극에도 커다란 파문이 일어 가라앉았던 불안들이 올라와 혼탁해짐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사람이 아프면 얼마나 광범위하게 민폐를 끼치게 되는지, 또 많은 사람들의 배려가 있어야지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아픈 사람의 보호자는 버틸 수 없을 만큼의 큰 중압감과 부담스러움,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는지도 느꼈기에 자연스레 ‘아프면 x 된다’라는 사고가 마음속에 반복 입력되어 버린 것 같다. 그래서 그랬을까. 날 드문드문 괴롭히던 이유 없는 불안은 건강염려증이라는 번듯한 이름표를 달고 재방문했고 얼결에 그것과 단짝이 되어 병원 투어를 하던 중, 아빠가 남긴 마지막 유산과 조우하게 되었다.


나의 병명은 고지혈증.으로 인한 경동맥 혈관 협착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의사는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부모님이 지병이 있으신가요?”

“엄마는 건강하시고,, 아빠가 고혈압 당뇨 심부전증 뇌졸중 다 있으셨어요. 지금은 심부전으로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시고요."

"술, 담배도 일절 안 하시고.. 운동도 하시고.. 체중관리도 잘하셨고, 뭣보다 혈중 중성지방이 너무 낮아요. 이러면 식단 관리도 잘하고 계신다는 건데… 그에 비해 이렇게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고 혈관에 플라크가 끼어있다는 건, 아무래도 유전이죠. 부계 쪽 유전력일 확률이 높습니다.”

“유전이면, 방법이 없는 건가요?”

“식단 조절을 하셔도 유의미한 변화는 없으실 겁니다. 지금도 식단 조절을 하고 오신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냥 약을 드시는 게 안전합니다. 특히 경동맥이 40프로가 막혀있는 경우에는 약이 최선이에요. 사실 저도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이 정도이신 건 처음 봅니다. 지금 발견한 게 어찌 보면 천운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천운이라는 건, 로또 1등 당첨 같은걸 천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 아닌가?

고작 고지혈증. 경동맥협착 따위를 34살에 발견한 걸 천운이라 한다면 내 입장에선 너무 억울한 일 아닐까?



이런 젠장

혈액검사지를 받아 집에 가는 길 눈앞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마구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빠가 미웠다. 여러모로 밉기만 하다.

'부계 쪽 유전력'

아빠가 남긴 마지막이자 떨칠 수 없는 위대한 유산.


좋은 거 주셨네 그래!!

아주 대단한 걸 물려주셨네.


당장이라도 요양병원에 찾아가서 표독스럽게 윽박지르고 싶었다. 

대체 나에게 해준 게 뭐 있다고 이 딴 거까지 물려주냐며. 도대체 당신은 나에게 어떤 부모였냐며.


널뛰는 분노는 다시 불안으로 재구성되어 테트리스처럼 쌓인다.

결국 나도 아빠처럼 온갖 병을 주렁주렁 달고 자식에게 거대한 부담감을 안겨준 채 치매에 걸리고, 요양병원으로 끌려가 콧줄을 하고 죽는 날만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드니, 나와 함께 멀뚱 거리고 있던 '건강염려증'이라는 이름을 가진 불안이 내 모가지를 턱 잡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른넷. 나는 여든둘의 경도치매환자의 보호자이자 본격적인 불안장애 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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