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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북 Jun 18. 2023

아빠의 장례식-2

기어코 한 번은 태워주는구먼 외제차.


잘 가소. 다음 생엔 만나지 맙시다.


코로나로 인해 밤샘 장례식 문화가 지양되어 늦은 밤이 되니 빈소가 텅 비었다. 새벽 12시쯤 짐을 정리하여 집에 들어갔다가 아침 일찍 다시 돌아왔다. 오늘은 입관식을 하는 날이다. 

"입관식 할 때 기절하면 나 잘 잡아주라.." 나는.. 이런 말을 남편에게 전달할 만큼 겁이 났다. 상정한 까닭은 갈증이 날 만큼 건조해져 버린 마음이기에 지금까지 의아할 만큼 평온했기에 이러다 갑자기 봇물 터지듯 슬픔이 밀려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었다. 가족의 죽음을 여러 번 경험해 본 결과 장례식 내내 잘 버티다가도 입관식과 화장 전 대면식에서 많이들 무너진다. 효자 불효자 할 거 없이 그랬다. 못다 한 마음이 많이 남을수록 많이 울더라. 남은 마음이 없으면 자기 연민 때문에 또 한 번 울더라. 부모의 죽음이야말로 태초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한 번쯤은 주변 시선 신경 쓰지 않고 맘 놓고 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감정을 한 번에 모조리 털어내 놓고 눈물콧물 뿜어대며 기절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빈소 한구석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접고 만들던 상조회사 직원들이 어느덧 보이지 않더니, 입관실로 가족들을 호출했다.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악문 채 잔뜩 긴장된 걸음을 뗀다. 어느덧 문 앞.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입관실 가운데 커다란 관이 보였다. 관에 누운 아빠는 이뻤다. 이쁘다고 밖에 할 말이 없을 만큼 하얗고 빛났다. 여기저기 금색 반짝이로 포인트를 준(?)  화장의 힘도 있겠지만 말이다. 종이꽃으로 장식된 아빠의 모습은 휘황 찬란 그 자체였고, 나는 그 모습에 왜인지 슬프기보다는 벅차올라 아빠를 한참 바라보다, 얼굴을 쓰다듬어보는데 서늘한 한기가 손으로 전해졌다.

뒤이어 장례지도사가 입관식을 시작한다.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시길 바랍니다"


생전 시뻘게진 얼굴로 못된 말만 내뱉는 아빠의 모습은 흡사 야차와 같았다. 나는 그런 아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싫었다. 중풍과 구안와사가 지나간 자리 비틀린 입과 주저앉은 눈꺼풀 안에 비치는 희끗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할 때면 공포스러우리만치 거북스러웠다. 또한 서른 넘은 다 큰 딸이 노인이 돼버린 아빠의 얼굴을 지긋이 살펴볼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아빠의 얼굴을 이렇게 똑바로 바라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아빠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부모 자식 간이라고 시신을 만지작거리는 게 무섭지 않고 애틋하다니. 아빠의 피부가 이랬구나. 이제는 다시 만져볼 수도, 바라볼 수도 없구나. 하는 마음이 용기를 북돋아줬는지 모른다.


"노잣돈은 어느 분이 올려드리겠어요?"


상조회사 직원이 따로 준비한 가짜 돈을 내밀며 누구여도 상관없으니 부담스러워하지 말라 설명해 주었지만 이런 게 첨이라 머뭇거리는 새, 엄마가 옆에서 그것을 턱 받아 들었다. 그러더니

"이번 생에 우리가 어떤 악연으로 만났는지 몰라도 모쪼록 잘 가소, 다음 생엔 우리 만나지 말고, 서로 좋은 모습으로 태어납시다."

노잣돈을 품에 조심스레 넣어주며 잔뜩 젖은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엄마의 솔직한 고백에 갑자기 분위기가 묵직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아빠 너무 이쁘네~혈색이 아주 나보다 좋네..." 하며 철딱서니 없이 종알대고 있던 나는 식은땀이 났다. "아유 내가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하며 엄마가 당황한 듯 눈물을 닦으며 뒤돌아서는데 마치 봐서는 안될 것을, 들어서는 안될 것을 들은 아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요양병원을 보내니 마니 집에서 악다구니를 하던 시절. 아빠가 그 와중에 갑자기 엄마를 불러오라 요구했는데,  한참 가사도우미 등의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던 때라 엄마를 앞에 대령해 놔도 기껏해야  '너 너 너' 거리며 밥이나 하고 집이나 치우라는 얼척없는 요구나 해댈게 뻔했기 때문에 이 둘의 만남을 추진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게 아빠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마에게 흘리듯 물어봤고 돌아온 건 역시나 단호한 거절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그런 관계다. 법적으론 부부지만, 완벽한 타인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대함에 있어 꼭 방금 전 돈을 빌려준 채무자처럼 뭔가 받아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대했다. 그 과정에서 "너 까짓 게", "너 따위가"등 존중이라고는 볼 수 없는 호칭들은 덤으로. 

엄마의 가출 후에도 자라나는 나를 위해 만나야 하는 상황들이 있었고 어린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설레어했으나 역시나 아빠는 엄마를 무식하고 모자란 여자취급을 하며 틈틈이 면박을 주었기 때문에 언제나 파국이었고 내가 커감으로 완전히 연을 끊었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거의 n년간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던 둘은 시간에 의해 악감정이 희석될 때마다 나를 위해서라도 잠시 뭉쳐보자며 돈벌이가 될 일을 함께 모색해 봤으나 늘 개같이 망했고 그때마다 서로의 귀책을 맹렬히 비난하며 돌아섰다. 그렇게 악연의 일대기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왔다. 아빠가 엄마에게 보여주는 감정은 20년 전의 것이라고 보기에 의아할 만큼의 날것 수준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혼상태가 아니니(죽기 전까진 이혼도장 안 찍어준다고 강짜를 놓음 무려 3N년동안) 아직도 엄마는 본인의 지배하에 있다고 착각한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엄마는 달랐다. 아빠라는 존재를 인생에서 지워버린 지 오래였다. 구전설화처럼 그저 옛날 옛적 못되고 능력 없는 대머리 영감이 살았습니다. 수준의 케케묵은 기억으로 당장 아빠가 눈앞에서 죽어 나자빠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대했다. 그 모습이 나에겐 무척이나 매정해 보였고, 때때론 나를 사무치게 외롭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어찌 보면 '공동책임자'아닌가. 따라서 원망도 많이 하였으나, 아빠와는 정반대인 남편을 만나 살아보니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될 듯도 했기에 엄마가 이 장례식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음은 오로지 나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부부의 정 따위는 어불성설, 제사상이나 안 엎으면 다행일 수준이지. 때문에 나는 엄마를 입관식에 데려가야 할지 말지 깊은 고민을 해야 했는데, 엄마는 당연하다는 듯 따라나섰고, 이렇게 씩씩하게 마지막 인사까지 할 줄은 미처 예상 못한 부분이었다.


그건 내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 비로소 어른의 이별이라 말할 수 있을까.


무지하게 미웠을 것이다. 증오스러웠을 것이다. 처음의 실패는 실수라 쳐도 두 번째의 실패는 본인의 삶에 대한 채점표로 느껴졌을 것이다. 형편없기 짝이 없는 점수. 다른 이들이 당연히 소유하고 누리는 정상적인 가정을 두 번이나 실패했음을 처절하게 느껴야 했을 것이고 서로의 존재가 내 삶이 망했음을 증명하는 증거품이요, 전리품이니 그 둘이 자석의 양극처럼 가까워질 수 없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아빠에게 부디 다음 생엔 잘 태어나라고 해주는 엄마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애증? 동정? 서글픔?

예상도 못 한 이벤트에 받은 충격 탓인지 그렇게 걱정하던 나의 눈물은 존재조차 관심받지 못한 채 엄마 눈가에 번진 마스카라 자국만 기억에 남은 눈물의 입관식은 그렇게 종료되었다.





"운구는 어떻게 하기로 하셨나요?"


운구는 보통 상주의 친구나 친지들이 하는 게 보편적이지만, 코로나도 그렇고 발인 날짜가 월요일이라 밤을 새우고 발인을 부탁할 만한 친구들이 마땅찮았다. 장정 여덟은 들러붙어야 하는 아빠의 체격 때문에 운구는 처음부터 나의 숙제 같은 것이었고 해결책을 못 찾았기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하고 있으니 장례지도사가 도움을 줬다.


"운구하실만한 분들이 적으시면 대행 서비스는 어떠세요?"

"오! 운구에도 대행 서비스가 있나요?"

"그럼요, 요즘은 대행 서비스도 많이 쓰십니다. 연결해 드릴까요?"

"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금액은요?"

"여섯 분 오시고 @@ 만 원 정도 됩니다."


빈소를 예약할 때 중간에 사이즈를 하향 조정하며 100만 원이라는 차액이 남았었다. 운구인원들의 식대까지 포함하니 계산이 얼추 맞았다. 예전 할머니 장례식 때도 아마 이랬었지. 유품을 정리하던 중 할머니가 모아둔 오래된 파스 사이에 몰래 숨겨둔 돈 30만 원을 찾았는데 그 금액이 장례를 도와준 교인분들의 식대로 딱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장례를 몇 번 치르다 보면 뭔가 이상요상한 일들을 겪기 마련이다. 쓰임에 맞게끔 어디선가 똑떨어지는 돈도 그러하다. 이 돈 역시 여기에 쓰라고 남겨준 것인가 싶어 주저 않고 예약까지 끝냈다. 결론적으로 운구 대행 서비스를 이용한 것은 장례식을 통틀어 가장 잘한 결정이었고, 장례식의 대미를 장식했음을 단언할 수 있다.




기어코 한 번은 태워주는구먼 외제차.



둘째 날의 시간은 더욱 빨리 지나간다. 조금 느지막한 오후 시간, 아빠의 친구분들 두 분이 차례대로 조문을 오셨다. 한 분은 상상도 못 한 정체로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홍 씨 아저씨였다. 아빠가 입원해 있을 당시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 주라 했지만 사기꾼이란 소리를 듣고서 다시 연락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저씨도 뭔가를 눈치채셨는지 그 후로 일절 연락은 없었다. 장례식 때도 오랜 고민 끝에 연락을 했고 빈소에 도착한 홍 씨 아저씨는 많이 지친 표정이셨다. "수고가 많았구나" 아저씨는 부의금을 낸 후 식사도 하지 않고 돌아가셨다.


한 분은 홍 씨 아저씨가 사기꾼이라며 나에게 말해준 김 씨 아저씨였다. 나는 그를 삼촌이라고 불렀는데 키가 훤칠하고 세련된 말투를 보유한 분이었다. 아빠와는 전혀 다른 카테고리였으나 해병대 군악대로 묶인 선후배 지간으로 오랫동안 연을 잇고 지내셨는데 그는 들어서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조금은 긴 애도의 말을 아빠에게 남겼다. 삼촌과는 중간중간 연락을 하곤 했는데 밤낮 할 거 없이 빗발치는 아빠의 전화가 버거워서 차단을 했다고 하시길래 저도 차단했으니 괘념치 마시라라고 말하곤 서로 힘겹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삼촌은 이 나이쯤 되면 아파 죽거나 너희 아버지처럼 정신을 놓거나 둘 중 하나라고 껄껄대며 담백하게 말씀하셨으나 나는 그 가벼운 농담 이면에 숨어있는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첫 면회 때 아빠와 영상통화를 시켜드렸고 아빠의 바싹 마른 얼굴을 본 삼촌의 경악한 표정이 생생하게 기억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삼촌은 "어이 형님, 왜 거기 그러고 있수, 무적 해병 정신으로 얼른 나와야지!"라며  농담을 던졌지만 곧 울음이라도 터트릴 듯 떨리는 목소리였다. 가진 거 하나 없지만 언제나 꼿꼿하고 자신만만하게 살던 아빠가 저렇게 작아진 모습은 삼촌에게도 충격이었을 거다.


"면회도 못 가고, 연락도 못해서 무척 미안하다" 하며 내 어깨를 토닥이는 삼촌에게 나는 꺼낼 말이 없었다. 아빠를 차단하고 멀리한 것에 대해 어떤 불만도 없었기에. 삼촌 역시 밥 한술 드시지 않고 자리를 뜨셨다. 이 둘이 아빠의 유일한 지인이었다.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을만한 가치 있는 말은 없으니 그저 함구무언할 뿐이다. 입가에 씁쓸함만 감돈다. 삶이란 무엇일까.


새벽 6시에 발인. 화장터는 서울. 장례식장에 대충 이불을 펴고 잠을 청했다. 저녁에 도착한 언니도 함께.

엄마. 남편. 나. 언니 네 명이 장례식장에 자리를 펴고 누웠다.

피곤했는지 눈을 잠깐 감았다 뜨니 다음날이 되어있었고 짐을 챙기고 야외로 나가니 9월 중순의 습습하고 서늘한 새벽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1층에는 버스 한 대와 리무진 한 대가 미리 정차해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장례식의 하이라이트인 운구 대행 서비스도.

그리고 이건.. 참 뭐랄까....



"와..... 진짜.. 아빠!!!"


나는 별안간 얄미움이 치솟아서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관속에 있을 아빠에게 윽박질렀다.

'진짜, 자기 좋아하는 건 어떻게든 해야 직성이 풀리는구만..!'



"장인어른이 진짜 좋아하시겠다 그렇지?" 

흰 장갑을 끼고 영정사진을 들고 있던 남편이 피식거리며 말했다.

"오메메..느그 아빤 진짜 뭔 복이냐 딸내미 잘 만나서 호강하네"

엄마 역시 한마디 더했다.


그 정도였다.

대행서비스를 신청해 놓고도 그저 운구를 할 정도의 체격이 있는 분들로만 구성이 되어있을 줄 알고 큰 기대가 없었는데, 멋스러운 제복 차림으로 도열해 있는 운구 대행 직원들을 보자마자 와!!!! 하는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비로소 효가 완성되는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누구보다 우쭐해 있을 아빠의 모습이 상상되기도 하고.


곧 발인식이 시작되었다. 가장 앞쪽에 서있으신 분이 허리춤에 달린 조그마한 스피커를 누르자 곧 웅장한 장송곡이 울려 퍼졌다. 상주인 남편의 뒤를 관을 든 상두꾼들이 따르고 차량에 관이 안치된다. 그 후 거수경례.

나는 살아생전 폼생폼사였던 아빠의 니즈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었다는 만족감에 도취되어 차에 올랐다. 길쭉하고 번들거리는 자태를 뽐내는 링컨사의 리무진이었는데 처음 타본 리무진의 고급진 내부에 감탄하며 저마다 한 마디씩 하는 와중 마지막으로 탑승한 엄마가 쿨하게 내뱉는 말.


"느네 아빠가 옛날에 매일같이 하던 말이 이번 일만 잘되면 외제차 태워준다는 소리였는데 결국 죽어서야 태워주네."


엄마의 시니컬한 소감에 우리는 잠시 정신을 잃었고 눈을 뜨니 어느덧 화장장이었다.






아침해도 뜨지 않은 어둑한 새벽. 1등으로 도착하였으나 화장장이 아직 오픈전이라 차에서 내린 후 정문 근처에서 대기해야 했다. 뒤이어 다른 상조 차량들도 줄줄이 도착하였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들 손자며느리까지 3대가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는 집도 있는가 하면, 무연고 시신 운구 차량이라고 이름 붙여진 까만색 봉고차도 보였다. 버스에서 사람이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는 어느 집의 운구행렬을 보면서도 가족이라곤 넷이(엄밀히 따지면 피를 나눈 가족은 나 하나뿐..) 전부인 우리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처량하진 않더라. 딸, 사위, 아내, 심지어 넘의 집 딸내미까지 새벽같이 발인에 따라 나와 있는데 남 부러울게 뭐 있단 말인가.

그중 운구 내내 시선집중을 받은 번듯한 제복을 입은 직원들도 한몫을 단단히 했으니 (쓰고 보니 운구 대행 서비스 광고글 같지만, 전혀 아님을 밝히는 바이다.) 아빠로선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였을 것이다. 시간이 되어 장례식장의 문을 열렸다. 장엄한 음악과 함께 아빠가 첫 번째로 입장을 했고 화장 전 마지막 대면식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 짧은 목례를 하였고, 뒤이어 운구 대행 직원 리더분의 '전원-경례!'라는 힘 있는 구령과 함께 도열한 여섯 명의 칼 같은 거수경례를 끝으로 화장이 시작되었으니, 나는 이 장례식의 대미를 이렇게 평하고 싶다.



"개쩐다......!!"





식사와 휴식을 취한 후 아빠의 유골함을 받기 위해 대면실로 향했다.

창문 너머로 직원이 아빠의 분골 된 유골분을 한번 보여준 뒤 경건한 몸짓으로 조심스레 유골함에 옮기는데 뭔가.. 뭔가 이상하다.


"어어.... 넘치는 거 아냐?"

"넘치면 어떻게 해? 따로 포장(?) 해 와야 하는 거야..?"


기골이 장대한 우리 아빠는 뼛가루의 양도 남달랐다. 어쩜 마지막까지 이렇게 유니크함을 뽐낼 일인가 싶다. 혹시 몰라 유골함을 가장 큰 사이즈를 선택했음에도, 하염없이 쏟아지는 골분에 다 안 담기는 거 아니냐며 엄마와 남편을 붙잡고 종알대고 있는데, 세상이 떠나가라 통곡과 울음이 이어지는 옆 호실의 소리에 조금 머쓱해져 입을 닫았다. 어쨌든 다행히도 유골분은 잘 모두 잘 옮겨졌으며 온기가 가시지 않은 따듯한 유골함을 남편이 두 손으로 조심스레 받아 차에 올랐다.


장지는 시아버지가 계신 추모공원이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 같아 미리 예약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게 1도 남겨준 것이 없는 우리 아빠는 '유산(heritage)'라는 뜻의 고급스러운 봉안담에 안치되었다.

몇 번을 말하지만 아빠는 참 운이 좋다. 날씨마저 완벽했기 때문이다. 구름 한 점 없던 시리도록 시퍼런 가을 하늘이 우리를 비추었다. 엄마는 당신이 죽으면 자연스럽게 바람 타고 떠나겠노라, 뒷산 푸르른 나무 사이에 뿌려주라던 오랜 신념을 철회하고 "나도 이렇게 장례 멋들어지게 함 치러줘 봐라."라고 요청했다. 그 정도로 아빠의 장례식은 완벽했으니 한 번의 잡음도 없이, 문제도 없이, 물 흐르듯 안온한 장례식이었다.


그렇게 아빠를 보냈고,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건 그로부터 1년 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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