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없는 도시에서 남는 것
길이길이 대중에게 공감받는 클래식, 좋은 이야기는 항상 살아있는 캐릭터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대를 관통하는 어떠한 진리를 담고 있다. 90년대에 처음으로 방영했지만 25년이 넘은 지금까지 사랑받는 "섹스 앤 더 시티"는 뉴욕에 사는 네 명의 여주인공들의 삶과 우정과 관계들을 따라가는 세미-다큐멘터리 형식의 드라마다. 그리고 여느 좋은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네 명의 주인공 모두에게서 나와 (아마도 비슷한 나이대의 모든 여자들과) 비슷한 부분을 찾을 수 있다.
금발의 사만사는 연애보다는 가벼운 관계만을 지향한다.
그녀에게 감정이란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나 결정을 내리는 기준이 아닌 방해물에 불과하다. 일주일의 연애도 그녀에게는 긴 편이다. 쉽고 빠르고 깔끔하게 성적으로 만족하는 것만이 그녀가 사람을 만나는 이유.
샬롯은 뚜렷한 목적을 갖고 남자를 만난다.
그녀는 결혼을 하고 싶다. 최대한 빠르게, 가능하다면 돈이 많고 잘생겼으며, 이름 뒤에 로마자 (II)가 붙는 남자로. 모든 기준에 부합하는 남자를 만나고, 결혼까지 하지만 사소한 계기가 돌이킬 수 없이 커지며 결국 이혼한다.
시니컬한 변호사 미란다는 사랑보다는 개인적인 성공이 훨씬 중요하다.
남자 이야기에 혈안이 된 친구들을 한심해한다 - 도대체 왜 우리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거야? 우리의 성취, 우리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해? 하버드를 졸업하고 척척 쌓아온 커리어에 비하면 어떤 남자도 시시하다.
모든 이야기는 가장 핵심적인 "주인공" 캐리의 세련되고 섹시한 문체의 에세이 형식으로 전달된다.
캐리는 "New Yorker" 신문사의 작은 섹션 하나를 책임지는 섹스 칼럼니스트다. 캐리가 던지는 연애와 사랑, 결혼에 대한 과감한 질문을 서두로 드라마의 모든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1/4 세기가 지난 지금의 대한민국에 적용해도 큰 무리가 없다.
In a city as cynical as New York, is it still possible to believe in love at first sight? - 뉴욕만큼 시니컬한 도시에서, 첫눈에 반하는 것이 가능할까?
Can you change a man? - 과연 여자는 남자를 바꿀 수 있을까?
Can we date outside of our caste? - 우리의 "신분"을 벗어나서 연애할 수 있을까?
Can you ever really forgive if you can’t forget? - 잊을 수 없다면, 정말로 용서할 수 있을까?
결국 사랑과 연애와 결혼에 대한 질문들은 항상 비슷했던 것일까. 나의 조상님들도, 나의 증조손녀도 27살쯤 되었을 때 나와 비슷한 의문을 가졌고, 가지는 것 아닐까?
판권을 비싸게 팔기에는 해피 엔딩이 더 선호돼서인 지, 아니면 시즌 3 이후로 캐리 역할의 배우가 드라마의 제작진이 되어 본인의 캐릭터에 너무 몰입해서인 지 모르겠지만 네 명의 캐릭터에게는 나름의 해피엔딩이 주어진다.
사만사는 암에 걸리고 나서도 옆에서 자리를 지켜준 모델 스미스와 함께하며 진정한 사랑과 함께함의 의미를 깨닫는다.
샬롯은 전남편과 이혼하는 과정에서 만난 이혼 전문 변호사에게 열렬한 구애를 받으며, 자신의 취향이 전혀 아닌 이 못생긴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와 평생 행복하게 산다.
미란다는 자신보다 조건이 비교도 안 되게 나쁘지만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는 장점을 가진 바텐더 스티브의 아기를 임신한다. 수많은 오해가 있지만, 결국에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한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연애시장"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기분이 더러워진다. "안 좋아진다"의 은어가 아니라, 정말로 무언가 추하고 찝찝한 것을 만진 직후처럼 소름 끼치게 싫다. 어떤 시장이든 그 안에서는 모든 게 숫자로 치환된다. 나의 외모와 경험들과 세세한 사람됨에 점수가 주어진다는 게, 그리고 처음 본 상대를 유사하게 분석한다는 개념이 기형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통계는 다르다. 대표적인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매출이 2019년 287억 원에서 2024년 454억 원으로 1.5배 넘게 증가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2-30대 남녀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학벌, 부모님의 노후 준비 여부, 조부모님의 유전병 유무를 서드 파티 중개업자에게 넘기며 나의 "점수"와 맞는 좋은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
내가 혐오하는 방식이 "시장"이 정한 정답이다.
또 혼자가 되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목표하는 내가 막연하게 결혼할 것이라고 예상해 왔던 X살에 점점 가까워지며 전혀 조급해지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결혼하기 위해서는 연애를 해야 하고, 연애를 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해야 하는데. 언제 사랑에 빠져야지 그로부터 A일 후에 연애를 하고, B 년 후에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머릿속을 맴도는 이 질문이 참 우습다.
근본적인 문제는, 내가 사랑이 뭔 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것은 편안함일까, 설렘일까, 연민일까, 소유욕일까, 아니면 아직 내가 느껴보지 못한 아예 새로운 감정일까. 그리고 내가 노력한다고 느낄 수 있는 감정일까? 사랑해서 연애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연애를 통해 사랑을 느낄 수도 있는 것일까? 결혼하지 않으면 못 느껴보는 사랑이 있을 수도.
주인공 캐리처럼 다시 수많은 물음표들을 안고 이 도시를 방황하게 되었다.
이 드라마는 연애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숨겨진 두 번째 주인공은 "시티"이다.
서울은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말없이 수많은 선택지들을 내놓는다. 거기서 촉발된 끝없는 가능성들은 각자 다른 결론을 낸다.
누군가는 조건을 계산하고, 누군가는 감정에 몸을 맡긴다. 누군가는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살아간다.
대신 도시와 다시 사랑에 빠진다.
퇴근 후에 달궈진 머리를 서늘한 밤바람으로 식히며 뛰는 청계천이 좋다.
몇 개월 전에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도곡의 테니스장이 좋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언니와 강남에서 맞대는 술 한 잔이 좋다.
보고 싶었던 린치의 영화를 상영하는, 그리고 딱딱한 팝콘을 판매하는 강변의 영화관도 좋다.
독일에서 돌아온 J와 학창 시절을 함께했던 잠실의 석촌호수를 산책하는 게 좋다.
도시와 다시 사랑에 빠진다는 건, 결국 나 자신과 다시 사랑에 빠진다는 뜻이다. 27살의 나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결혼정보회사에서도 만날 일 없는 그녀와 "자만추"할 생각에 설레기 시작한다!
어떻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혼자 바라본다. 내가 누구인 지, 무엇을 원하는 지,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지 조금은 더 분명해진 그 후에는 마지막 연애를 하고 싶다. 정말 좋은 사랑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