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스, 댄스, 댄스

고집쟁이의 영화추천 (16) : 퐁네프의 연인들

by 앙떼뜨망

며칠 전 퇴근길에 "그 통로"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일을 처음 시작했을 무렵 괴롭고 견디기 힘든 날이면 나는 그 통로에서 전 애인을 만났었다. 지하와 지상을 잇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계단길이었지만 당시에 내게 그곳은 잠깐이라도 숨을 쉴 수 있는 작은 쉼터였다.


계단을 따라 올라갔는데, 위에서 한 커플이 내려오다 입을 맞추는 순간을 봤다.

남자는 키가 컸다. 그처럼.

여자는 온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나처럼.


그 장면을 보는 순간, 당시에는 가장 특별하게 느껴졌던 우리가 지극히 평범한 한 쌍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없다고 느꼈던 상상이 더 슬플까, 아니면 원하면 언제든 다시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현실이 더 슬플까?




퐁네프로 몰려난 자들은 모두 어딘가 고장 나 있다.


알렉스는 마약과 술에 중독된 거리의 곡예사이고, 한스는 어린 아들의 죽음과 그로 인한 아내의 자살적인 행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현재를 밀어붙일 욕망도, 과거를 붙잡을 미련도 없다. 공사로 외부와 차단된 퐁네프 위에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유령처럼 하루를 연명할 뿐이다.


그러다 겉보기에는 멀쩡한 - 도대체 어쩌다 이 다리로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 불청객 미쉘이 알렉스의 자리에 눕는다.

어쩌면 그 자리에 어떤 젊은 여성이 누워있었어도 알렉스는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그녀가 늘 품속에 총을 지닌다는 것도, 그림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쥘리앙이라는 남자와 끝나지 않은 관계가 있다는 것도, 매일 조금씩 시력을 잃어간다는 것도 사랑의 이유가 되었겠지만,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됐을 것이다.

알렉스에게 사랑은 대상의 고유함보다는 붙잡을 무언가가 필요한 상태에 더 가까웠을 테니까.


하지만 하필 미쉘이 누워 있었고, 알렉스는 하릴없이 그녀에게 빠진다.


image.png 순서대로 알렉스, 한스, 미쉘

사랑은 원동력이다. 동시에 족쇄이다. 아니, 원동력이기 때문에 족쇄가 된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에 서 있던 퐁네프에서 이유 없이 살아가던 알렉스는 미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원하는 것’이 생긴다.

바다에 가고, 돈을 훔치고, 미래를 그린다.


아주 잠시지만 두 사람은 서로와 함께이기 때문에 불꽃놀이같이 폭발적인 감정을 느낀다.

image.png 최고의 시퀀스. 이 장면 때문에 인생영화 등극함!


그러나 그녀를 놓고 싶지 않은 욕심은 공포로 변한다. 멀어가는 그녀의 눈을 이용해 그녀를 세상과 더 단절시킨다. 시력을 되돌릴 수 있는 기술이 발견되었다는 가족의 광고가 파리 전역에 붙자, 알렉스는 그것을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그녀를 살릴 수도 있는 가능성은 자신을 떠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image.png


라디오를 통해 알렉스가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미쉘은 알렉스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퐁네프를 탈출한다. 그녀가 떠난 걸 확인한 알렉스는 미쉘의 총으로 자해하고, 직후에 체포되어 형을 산다.

미쉘은 감옥에 수감된 알렉스를 찾아간다. 둘은 알렉스의 출소날 완공된 퐁네프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image.png 다 나은 두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보며 다시 초상화를 그리는 미쉘

알렉스는 절뚝이던 다리가 나았고, 미쉘은 시력을 되찾았다. 그런 만큼 둘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다. 쓸데없는 농담으로 깔깔거리지만 알렉스는 본능적으로 안다. 미쉘은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여러 감정에 휩싸인 알렉스는 미쉘을 잡고 강으로 빠트린다. 둘은 함께 추락한다. 상황에 의해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한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선택된 추락 - 사랑은 끝났지만 같이 퐁네프를 벗어나는 것이다.


지나가던 배로 인해 구출된 둘은 과거의 공간을 버리고 파리를 떠난다.




둘의 사랑은 서로가 유일무이한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라, 결핍에서 비롯되었다. 결핍이 채워진 후에 그 사랑이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가짜가 되는 건 아니다.

Le jour où je ne verrai plus rien, tu seras ma dernière image. 내가 아무것도 못 보게 되는 날이 오면, 너는 내 마지막 이미지일 거야.


이런 생각들을 하며 오히려 연애와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거의 해결됐다. (ㄹㅇ 인생영화됨....)


그래서 그 통로의 새로운 주인공인 키 큰 남자와 잘 웃는 여자가 서로 덕분에 더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퐁네프 위의 불꽃놀이처럼 짧더라도 겁없이 빛나는 순간들을 들이키길 바랐다. 그리고 그 시간이 언젠가 끝나더라도 그들을 살게 했던 기억으로 남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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