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앙떼뜨망 May 13. 2023

홀로는 지울 수도, 덮을 수도 없는 상처

고집쟁이의 영화추천 (5) : 설행 리뷰

제목 : 설행

감독 : 김희정

연도 : 2016년

런닝타임 : 1시간 38분

이런 사람에게 추천해요! : 난해하지 않은 한국 예술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 박소담 배우의 장편 데뷔작이 궁금한 사람, 어떠한 중독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 운명과 구원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누구든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이 있다. 노래를 할 때 목소리가 좋아서, 팀플레이를 할 때 리더십이 강해서, 슬플 때 진심으로 위로하는 모습이 예뻐서… 난 스스로 이럴 때를 "반짝반짝 순간"이라고 이름 붙였다.

나의 경우에는 연애를 할 때 상대방이 항상 언급하는 나의 매력은 “밝음”이었다. 같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웃게 된다고, 삶을 더 긍정적으로 보게 된다고 얘기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 밝음이 배가 되어 서로가 더 빛날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내 밝음을 상대방이 흡수하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도화지에 먹을 떨어트렸을 때 순식간에 검은색으로 번지지만 먹 자체는 기존의 새 까만색보다 흐리게 희석되는 것처럼 말이다.

관계를 이어갈 때에는 이에 대한 불만을 느끼지도 못했지만, 막상 관계가 끝나니 내 밝음이 소비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억울함을 느낄 때도 있었다. 상실의 잔재는 어두울 수밖에 없기에.


“설행”에서 신부 마리아는 주인공 정우를 구하고, 가슴에 총알을 대신 맞아 죽는다.

또, 정우가 아버지를 총으로 쐈을 때 마리아의 오른쪽 뺨에 깊은 상처가 생겼다. 그러자 정우의 죄가 씻겨 내려간다.

마리아의 깨달음과 기도가 정우의 죄라는 도화지를 검게 물들인 순간들이다.

설행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정해진 운명, 그리고 그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의 운명은 지문처럼, DNA처럼 예정된 것일까? 그리고 개인이 다른 개인을 구원할 수 있을까?




영화는 알코올 중독자인 청년 정우가 서울에서 산속 시골로 향하는 고속버스를 타며 시작된다.

“이번엔 진짜 잘해야 돼,” 하는 어머니에게 잘 알겠다며 끄덕이면서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생수처럼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정우의 모습은 누가 봐도 속수무책이다.


정우의 어머니는 예전에 자신이 수녀로 있었던 산속의 요양원 “테레사의 집”에 정우를 보낸 것이다. 정우는 몰래 술병을 숨기면서까지 들어오지만, 수녀들은 귀신같이 눈치채고 어느새 술병을 모두 치운다.

들어오자마자 어린 수녀 마리아 (박소담)이 정우에게 비정상적으로 관심을 보인다.

정우에 방 안에는 얼굴에 깊은 상처가 있는 마리아의 그림이 있다. 수녀 마리아는 그 그림의 유래를 설명한다.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는 폴란드의 기독교 유물이자 국가 상징물 중 하나인데, 1400년대에 후스파가 수도원을 습격해서 성모상을 포함한 여러 유물들을 약탈하려고 할 때 미동도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기분이 나빠진 후스파 일당 중 한 명이 창으로 그림을 찌르자 성모의 얼굴에 두 줄의 상처가 남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그 후 많은 화가들이 그림 위에 덧칠을 하려고 했지만, 페인트로 상처를 덮을 때마다 매번 다시 상처가 나타났다고 한다. 마리아는 그림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 외에도 의미심장한 말을 자주 던진다.


"아저씨가 꿈에 나왔어요. 어떤 꿈인지는 차차 설명드릴게요."

"아저씨를 위해 기도할게요. 아저씨가 너무 불쌍해요."


정우는 테레사의 집에서 점점 회복되는 듯 하지만, 가끔은 하늘이 빨갛게 물들거나 땅이 흔들리는 것처럼 이상한 환상을 볼 때도 있다. 알코올 중독으로부터 회복하는 과정에서의 정상적인 혼돈인지, 아니면 테레사의 집에 이상한 점이 있는지 정우는 헷갈린다.

그러다 어느 날, 마리아가 정우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를 알게 된다.


마리아는 어느 날 수녀들로부터 달려서 정우가 타고 있는 차로 뛰어온다. 정우에게 어서 시동을 걸라고 재촉한다. 정우는 영문도 모른 채 달리기 시작한다.

어느 기와집 앞에서 멈춘다. 기와집 안에서는 한창 장례식이 진행 중이다. 마리아가 기도를 드리고 떠나려고 하는데, 술에 취한 삼촌이 그녀 앞을 막아서고, 독한 년, 눈물도 없는 년이라며 욕을 퍼붓는다. 그때 마리아의 어머니가 딸의 몸에 빙의한다. 마리아는 돌변하여 삼촌을 따끔하게 혼내고, 자신의 저승길은 따뜻하고 편하다며 읊조린 후 바닥으로 쓰러진다.


마리아는 무당인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고 싶지 않아서 수녀원으로 도망 온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와 똑같은 끝을 맞고 싶지 않아 수녀원에 온 정우와 같은 선상에 있다.


유사한 아픔을 나누는 마리아와 정우


살다 보면 때로는 정해진 길을 벗어나기 위해 죽을 듯이 달리지만, 뒤를 돌아보면 직선이 아닌 원을 그리며 달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맞이한 오이디푸스의 전설부터, 죽음의 품 안으로 달려오기 위해 볼드모트에서부터 도망간 해리포터와, 똑같은 현재를 겪기 위해 부모님을 만나 자신의 탄생을 하는 “Back to the future” 까지 많은 작품들이 이런 운명의 순환성이라는 개념을 차용한다.

정우는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기에 술을 마셨고, 마리아는 구원을 할 수밖에 없었기에 정우를 구한 것이다.


이야기가 진행이 되고, 정우는 테레사의 집에 자주 들르는 포수가 가방에 술을 갖고 왔다고 착각해 포수를 따라 눈 내리는 산속으로 간다. 그러나 포수는 가방에서 술이 아닌 죽은 아내의 뼛가루가 든 통을 꺼낸다. 정우와 본인은 닮았다며,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며 총을 꺼내 정우 앞으로 던진다.


"여기서 네가 죽거나 내가 죽어야지 나갈 수 있어."


어린 정우의 회상에서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는 포수는 아마 정우의 아버지, 그리고 머릿속 환상일 것이다. 그와의 만남으로 인해 정우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자신을 죽이려는 아버지/환상/포수를 피하며 허겁지겁 하얀 눈으로 덮인 산을 뛰어내려온다.

마리아는 정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해 산 꼭대기를 향해 달려온다.

격정적 대화 속에서 포수는 결국 총을 쏘고, 마리아는 정우 대신 총알을 받는다. 바닥에 허무하게 쓰러진다. 정우는 격양된 얼굴로 총구를 겨눠 포수를 쏜다. 그 순간 마리아의 얼굴에 검은 쳉스토호바의 검은 마리아와 같은 새빨간 생채기가 생긴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정우는 정신을 잃는다.


정우가 깨어나자 마리아가 아닌 새로운 얼굴이 그를 맞는다.

마리아의 행방을 묻자, 마리아는 다른 폐쇄된 수녀원으로 이동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정우를 위해 기도를 마쳤고, 이에 마리아가 할 일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지금으로서는 끝이라는 말이다. 이제는 마리아가 정우를 찾지 않는 이상 둘이 만날 일이 없다고 말한다.

마리아의 죽음은 환상이었을까?

정우가 마리아가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고 믿음으로써 정우는 구원된 것일까?

마리아의 얼굴의 상처는 아직 존재할까?


마리아는 정우를 위해 선물을 하나 남기고 갔다.

마리아가 남기고 간 공책

사람과 사람은 점 같다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졌다며 말하던 마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다.


이 영화를 보면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구원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기독교의 주 예수님은 알지 못하는 멍청한 인간들을 위해 십자가에 박히며 피 흘렸고, 그에 인간들의 죄가 사해진다. 그는 도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영화를 보면 "정우에 대해 뭘 알면서, 뭐가 그렇게 불쌍하다고 마리아가 희생을 한 거지?" 라는 고민이 생길텐데, 이와 일맥상통한다. "왜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산타 상그레부터 스파이더맨까지) 꼭  착하고 순수한 성녀는 고통받는 남자 주인공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지?" 하는 지겨움을 느끼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공책에 그려진 선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 정우가 술을 마시고 마리아가 죽은 사람을 보는 것처럼, 예수님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따른 것이 아닐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의 결과라는 결론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의문이 머리를 스친다. 피 흘린 것은 예수인데 왜 인간들의 죄가 용서되는 것일까? 죄와 동일한 양의 고통이 있어야지 균형이 맞춰지는 카르마의 제로섬게임이라면 신은 너무나 잔인한 존재가 아닌가.


불교에서는 구원의 문제를 조금 다르게 푼다. 정확한 해석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은 이렇다 : 인생은 윤회라는 개념을 통해 영원히 반복되는데, 이 고통의 순환을 끊는 유일한 방법은 깨달음을 얻고 열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곧,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밖에 없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봤을 때 나는 마리아의 희생이 조금 더 잘 이해가 갔다. (이 영화에는 기독교 뿐 아니라 샤머니즘을 포함한 여러 개념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 해석에도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씻을 수 없는 죄를 안고 살아온 이는 정우 뿐이 아니다. 마리아 또한 어머니를 배신했고, 그녀가 특별한 존재라고 믿는 수녀님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마리아는 총을 맞음으로써 자기 희생과 순수 선에 가장 가까운 행위를 하며 스스로를 구원한 것이다. 그리고 정우에게 주어진 공책은 먼저 깨달음을 얻은 마리아가 건낸, 정우가 해결해야 할 숙제에 대한 힌트다.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정우는 드디어 어머니의 유골을 땅에 묻으며 그녀의 죽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과거를 직면하게 된다. 과거의 한심하고 아둔한 모습을 탈피하고 깨달음의 경지에 드디어 한 발자국 다가간 것이다.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작고 큰 상처를 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 번 맺어진 인연은 가벼울 수 없기에 내가 낸 상처는 베자마자 내 마음에도 똑같은 깊이로 새겨진다.


우리는 홀로는 지울 수도, 덮을 수도 없는 이런 상처를 타인의 지혜와 힘을 서로 빌려 씻어내고자 노력한다. 중세시대의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한국의 불교인들은 108번 절을 하며, 인도의 요기들은 다양한 포즈로 기도를 하며 구원을 구한다.

내가 해석한 이 영화의 핵심은 스스로의 구원은 순수하게 상대를 위하는 마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는 메시지이다. 그 상대가 아주 옅은 인연으로 이어진 타인이라고 할지라도.


그러니 내가 검은 먹이라면 두려움 없이 희석되어도 되겠다. 더 이상 흰 곳이 없도록 검게 물들여도 좋다. 내가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검게 할 수 있다면!

작가의 이전글 욕망이라는 게임의 규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