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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Jun 02. 2023

아름다운 엉망진창, 삶의 회색지대

고집쟁이의 영화추천 (6) : 녹색 광선 리뷰

제목 : 녹색 광선

감독 : 에릭 로메르

연도 : 1986년

런닝타임 : 1시간 38분

이런 사람에게 추천해요! : 순간의 아름다움을 좇는 사람, 방향성을 잃은 사람, 이해할 수 없는 공허함을 느끼는 사람, 아름다운 미장센을 즐기는 사람, 특별한 스토리라인이 없어도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사람




에릭 로메르는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끌던 동료들인 장 뤽 고다르와 자크 리베트와 시네마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토론했다. 할리우드의 정형화되고 아름답고 논리적인 친절한 화면 구성을 비판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시작된 장르인 누벨바그. 멀쩡히 대화하는 두 캐릭터의 뒷모습을 잡기도 하고, 화자의 얼굴이 아닌 청자의 얼굴을 확대해서 보여주는 등 기존의 규칙을 파괴했다. 일부러 엉성하고 어색하고 불편한 영화를 만든 것이다. 누벨바그는 영화의 스토리라인도, 배우 출연진도, 아름다운 OST도 아닌 작가에 집중하며 작가주의를 표명했다.  


로메르는 마니악한 누벨바그와 상업적인 할리우드, 그 둘의 절충점을 찾고자 했다. 안짱다리를 하고 책을 읽는 여자, 대화하는 친구들, 수영하는 사람들에게서 매일매일의 평범함에서 아름다움을 찾고자 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추출하기 위해 요점만 압축해서 전달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대사들과 달리 평범하고 의미 없는 대화를 모두 보여준다. 정확한 대본 없이 배우들의 애드리브에 상당 부분 의존한다. 그래서 연기투로 뱉어내는 장면들에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당연히 외롭죠. 하지만 한편으로 난 순수한 상태로 내 에너지를 보호할 수 있어요. 계속 꿈꾸며 기다릴 수 있죠. 기다리는 게 나아요; 현실을 직시하거나 희망을 망치는 것보다요. 휴, 너무 많이 말했네요. 지쳐요...


주인공들의 행동에서 또한 계산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묻어 나온다.

그리고 주인공은 아플 정도로 현실적이다.


친구들과 대화하다가 별안간 눈물을 흘리는 델핀느


델핀느는 울보다. 그리고 원래 멘탈이 약했던 델핀느는 지금 더더욱 그렇다. 곧 휴가 시즌이라 다들 남자친구와 여행을 다닐 생각을 하며 기대감에 부풀어있지만, 델핀느는 아니다. 최근에 남자친구랑 헤어졌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아무나 만나보라고 조언을 하기도 하고, 먼저 새로운 남자에게 표현을 해보라고 제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델핀느는 새로운 시도를 할 생각만 해도 툭하면 눈물이 난다. 다른 사람들이 할 때는 자연스럽고 매력 있는 행동들이 델핀느에게는 어색하고 힘들다.


네 마음을 어떻게 알아? 찾아다니지 않으면... 나도 관찰은 해.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그 이후가 애매해서 그렇지.
어째서?
모르겠어. 난 적극적인 사람이 아니거든. 그냥 관찰할 뿐이지. 누굴 만나려고 특별한 노력을 하진 않아. 내가 잘못된 걸 수도 있지...


그렇다고 델핀느가 희망을 놓은 것은 아니다. 어디선가 녹색 광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쥘 베른이 뭐랬는 줄 알아요? 녹색 광선을 볼 때 자기 자신과 타인의 진심을 알 수 있대요.
정말 멋지네요, 그게 사실이라면요
녹색 광선을 보면 지각 능력이 높아지나 봐요! 여주인공도 그랬어요. 녹색 광선은 보지 못하지만 마침내 자기 자신의 감정과 그녀가 만난 젊은이의 마음을 알게 됐죠.


그리고 녹색은 델핀느만의 행운의 색이다! 로메르는 이 영화에 날짜를 적은 펜 색에도, 조연들의 패션에도, 배경에도 조금씩 초록색을 필수 요소로 추가했다. 녹색은 평온을 의미하는 색이다. 부드럽고 예민한 델핀느가 추구하는 삶과도 연관이 있다. 그녀는 세상에 남기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싶어서 채식을 시작하고, 그만큼 자연의 신비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공허함과 무력감에 쓰러질 만큼 약하지만 다른 이들의, 심지어 다른 동물들의 아픔에도 공감할 수 있는 선한 인간이다.


녹색 광선에 대한 이야기는 델핀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녹색 광선을 본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다고 하는데... 델핀느가 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원해서, 그것을 얻은 순간 떠날 가벼운 인연이 아닌 사람. 자기를 진심으로 봐주고, 자기 또한 진심으로 볼 수 있는 사람.


새로운 남자를 만나보는 델핀느


여러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델핀느는 파리로 돌아가는 기차를 잡는다. 그때 기차역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델핀느는 답지 않게 강한 끌림을 느낀다.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별다른 노력 없이 내면의 이야기들이 술술 나온다. 서로 첫눈에 반한 것이다.


바닷가를 걷다가 남자는 델핀느에게 다음 데이트 신청을 하려고 하지만, 델핀느는 남자의 말을 막는다. 잠시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간청한다. 그리고 함께 보게 된다. 저 멀리 희미하게 빛이 난다. 델핀느가 그렇게 바라던 녹색 광선이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현학적이기로 유명한 누벨바그 장르의 남자 감독이 만든 영화임에도 여자 주인공의 목소리를 정직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내가 여자라서, 인간이라서, 아니면 그저 나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난 언제나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이 영화를 보며 너무 마음이 아팠다.

대학교 새내기 때 기숙사에 살았던 기억이 났다. 개강하고 일주일쯤 됐을 때 난 아직 마음에 쏙 드는 친구들을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부모님과 떨어져 매일 술을 마시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최고의 일 년을 약속받고 시작한 기숙사 생활이었지만, 혼자 기숙사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나는 내가 상상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때 창 밖에서 신난 탄성이 들렸다. 술에 잔뜩 취한 새내기 5명이 깔깔 웃으며 벌써 절친한 친구가 된 양 휘청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제는 익숙한 친구 같은 감각이 뱃속에서 꿀렁 느껴졌다.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뒤쳐지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저 5명 중 한 명이 되기에는 내가 매력이나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인가?' 하는 불안감이었다.


델핀느가 초록 광선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것처럼 나도 그 "무언가"를 좇아 달리고 있다. 그 "무언가"만 얻으면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델핀느가 낭만적이고 운명적인 사랑을 찾았다고 볼 수 있을까? 이 영화는 닫힌 결말을 표방하지만, 난 델핀느는 언젠가 또 실망하고 또 울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너무나 순수하고 평화로운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델핀느가 원하는 것은 순수한 사랑이 아닌, 마음속 뻥 뚫린 공허함을 채우는 것이다.

그 공허함의 답을 남자에게서 찾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카드로 하루를 점치는 것만큼, 초록색을 볼 때마다 기대감에 부푸는 것만큼, 녹색 광선을 찾아 헤매는 것만큼 멍청한 행위다.


프랑스의 허무주의 철학자인 장 보드리아르는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시뮬라크르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주로 현대의 물질주의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고안한 개념인데, 아이 같은 순수함을 좇기 위해 디즈니랜드로,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배우를 내세운 광고로 소비자를 유혹하고 착취하는 현 세태를 묘사하는 개념이었다.


때로는 내가 스스로 내게 시뮬라시옹을 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내가 원하는 것은 금융권 커리어일까? 사실은 남들에게 '의미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저 남자가 맞을까? 사실은 온전히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고 싶은 것이 아닐까?


녹색 광선이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런 삶은 생각만 해도 건조하다. 하지만 계속 반복되는 실패와 절망과 희망의 사이클을 반복하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 델핀느처럼 울고 싶지 않다면.


하지만 한편으로 울고 있는 델핀느가 너무 예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무언가"가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산다면, 그게 진정 삶이 맞을까? 이 글을 쓰며 느낀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울어도 되겠다고 느껴진다. 난 지칠 때까지 카드를 뒤집고 살 테니, 녹색 광선을 봤다고 생각이 든다면 연락 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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