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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Jun 24. 2023

박찬욱 감독님, 도대체 어떤 사랑을 한 겁니까?

고집쟁이의 영화추천 (7) : 헤어질 결심 리뷰

제목 : 헤어질 결심

감독 : 박찬욱

연도 : 2022년

런닝타임 : 2시간 19분

이런 사람에게 추천해요! : 보세요. 그냥 보세요




대단한 감독은 두 가지 능력 중 하나를 갖고 있다.

자신의 존재감을 캐릭터들의 서사 사이에 숨기는 능력, 또는 관객이 싫증낼 틈이 없도록 훌륭한 자기복제를 해내는 능력.

동성애 로맨스의 클래식인 "브로크백 마운틴"을 만든 이안 감독이, 종교와 믿음 그리고 순수성이라는 주제를 황홀한 시각적 장치로 구현한 "라이프 오브 파이"와 같은 감독이라는 것을 알면 놀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또 인간의 잔인한 밑바닥을 가감없이 드러낸 "시계태엽 오렌지"를 감독한 스탠리 큐브릭이 공포영화의 정석인 "샤이닝"도 만들어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나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 능력을 더 높게 사는 것 같다. 그래서 난 데이비드 린치와 장 뤽 고다르, 타란티노와 특히 박찬욱의 영화를 사랑한다.


박찬욱의 영화를 10분이라도 보면 "아, 이거 박찬욱이 만들었나?"하고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캐릭터가 눈에 띄게 반복되거나, 서사나 주제가 겹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박쥐"에서 두 연인이 햇살 아래 모래로 흩어지는 장면을 보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 송강호의 눈물을 볼 때의 갑갑함을 느낀다. "아가씨"에서 김태리가 김민희의 손을 잡고 달릴 때 "친절한 금자씨"가 도끼를 학부모의 손에 쥐어줄 때의 희열을 느낀다. 박찬욱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의 내면과 감정을 점점 알아가고 있다는 일종의 황홀한 착각에 들게 된다.


나는 "헤어질 결심"이 박찬욱 감독 필모그래피의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온 것들 중 가장 명작이다. 처음 봤을 때에도 눈이 부을 정도로 울었고, 최근에 다시 보고 나서는 서늘한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으로서, 연인으로서 어떤 단계에 와 있는지에 따라 이 영화의 해석이 너무나도 달랐고, 느낀 감정도 상이했다. 때문에 이번 리뷰에서는 평소의 형식을 벗어나, 이 영화를 봤을 때의 개인적 상황과 그에 따라 해석한 엔딩의의미를 비교해보고자 한다.






I. 사랑에 고여있던 나


"사랑에 빠진"이 아니라 "사랑에 고여있는"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더 이상 흐르는 물에서 아름답게 수영하는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탓을 할 수도 없이 파도는 멈춰가고 있었다. 다시 흐르게 하기에는 상대방은 너무 자존심이 셌고, 난 너무 지쳐 있었다. 그래도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각자 특이하고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랑을 하는 사람의 시선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안타깝고 애절하다.


해준은 정말 처음부터 서래에게 빠진다.

마침내... 저보다 한국말 잘하시네요? 패턴을 좀 알고 싶은데요.

그녀의 꼿꼿한 몸에 반한 것일까? 서래가 궁금하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서래와 해준은 빠르게 사랑에 빠지는 여느 연인이 그렇듯이 반대되는 성향을 갖고 있다.


서래는 해준을 만나기 전에는 생존하는 데 급급한 사람이었다. 눈치가 빠르고 동물적 본능을 탑재하고 있으며, 어찌 보면 자신의 최선의 목적인 생존을 위해서라면 냉철하게 상황 파악을 하고, 논리적으로 계획을 실행시키는 잔인함이 있다. 그래서인지 해준보다 훨씬 자신의 감정을 빠르게, 정확하게 파악한다.


서래가 자연스러운 사람이라면 해준은 문명화된 사람이다. 서래를 만나기 전에는 더더욱 그랬다. 담배를 피고 싶어도 무말랭이를 씹으며 참고,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절대적인 준거점으로 설정하고 생활한다. 서래를 원하게 된 후에는 끊었던 담배를 몰래 피지만...

그래서 해준은 이 사랑에서 "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서래는 사랑을 느끼자마자 그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해준은 그것을 서래에게,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 인정하기에는 방해물, 혼자 머릿속에서 오고가는 어지러운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이다.


내가 품위 있댔죠? 품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요? 자부심이에요. 난 자부심 있는 경찰이었어요. 그런데 여자에 미쳐서... 수사를 망쳤죠. 나는요... 완전히 붕괴됐어요. 할머니 폰 바꿔 드렸어요, 같은 기종으로. 전혀 모르고 계세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해준은 서래를 사랑하며 드디어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비명 지르는 사진들을 떼어내게 되었고, 중국어로 아름답다는 말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랑이 서래를 향한 일방적인 것으로 변조되며 이 모든 아름다움은 의미가 없어졌다. 해준은 허상을 위해 품위를 포기한 것이고, 이에 서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상대가 되었다.


하지만 서래의 사랑은 이 순간 시작된다. 한 번도 그녀에게 폰을 바다에 버리라는 사람은 없었다. 모친은 서래의 손을 빌려 자살했고, 전 남편은 자신의 조악한 이니셜을 서래의 사타구니에 새기며 자신의 소유임을 표명했다. 월요일 할머니도 서래의 도움 없이는 요일도 구별할 수 없는, 그녀를 이용하려는 존재이다.

서래가 정말 원하는 것은, 해준을 꼬실(?) 때 사용한 언어를 보면 유추할 수 있다.


내 숨소리를 들어요. 내 숨에 당신 숨을 맞춰요. 이제 바다로 가요. 물로 들어가요. 당신은 해파리예요. 눈도 코도 없어요. 생각도 없어요.
(이후 중국어로)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아요. 아무 감정도 없어요. 물을 밀어내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밀어내요. 나한테.


폰을 바다에 버리라는 말, 그리고 진심으로 그녀를 떠난 해준의 결정은 서래에게는 구원이자, 가장 아름다운 사랑 노래보다도 달콤한 고백이었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녀는 해준을 닮고 싶어졌다. 애플워치에 대고 자신의 생각을 녹음하는 것도, 철썩이와 대치할 때의 거침 없는 행동도.

정말 해준과 닮기 위해서, 이제 그녀는 붕괴된 해준을 되려 구원해야 한다. 희생으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둬야 한다.


해준 씨... 바다에서 건진 전화, 그거 다시 버려요. 더 깊은 바다에 버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해준이 자기 입으로 말했다 :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서래는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헤어진다. 파도가 밀려들 때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젖고, 결국에는 죽는다.

자살하는 서래


그에 반해 해준은 파도처럼 덮치는 슬픔을 어찌할 줄 모른다. 바위 사이를 헤메며 광인처럼 서래의 이름을 외친다.

서래의 이름을 외치는 해준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억누르며 회피를 거듭하는 해준은 헤어지는 순간 붕괴된다. 그가 이전에 알던 붕괴는 이에 비하면 우스운 수준이다. 서래를 향한 마음을 직면하지 못했다. 너무 단단하게 존재하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그저 허구에 불과한 신념으로 덮으려고 한 해준의 우유부단한 태도가 서래로 하여금 해준이 자신을 정말 미워한다고 믿게 유도했다. 그래서 서래는 해준을 위해 희생하게 된다.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II. 사랑을 끝낸 나


사랑을 끝내고 나니 서래와 해준의 헤어짐을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되었다. 어쩌면 이 영화는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복수극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뭐, 세상에 조금이라도 그렇지 않은 사랑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두 번째로 감상하며 가장 좋아하게 된 이 영화의 디테일은 해준과 서래의 언어장벽이다. 서래는 서투른 한국말을 할 줄 알지만, 흥분하거나 할 말이 너무 복잡해서 한국어로는 전달이 안 될 때에는 핸드폰 속 번역기 어플을 사용해서 소통한다. 또, 해준이 첫 번째 살인을 수사하고자 서래의 뒤를 밟으며 애플워치로 서래의 중국어를 녹음해 한국어로 번역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번역은 절대 완벽할 수 없다.


(서래가 중국어로 고양이에게 하는 말을 해준이 옆에서 번역 앱으로 재생) 또 까마귀야? 내가 너한테 밥 준다고? 그럼 됐어. 나한테 선물을 꼭 하고 싶다면,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가져다 주세요. 난 좀 갖고 싶네.


이후 해준은 서래에게 묻는다. 정말 자신의 심장을 가지고 싶냐고. 그랬더니 서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심장? 조금 생각해보니... 아, 마음이라고 얘기했었는데. 기억이 난다.

연인끼리 이야기하다보면 분명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같은 문자를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갑갑함이 느껴질 때가 많다. 번역기를 연거푸 돌리며 치열하게 서로를 이해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다. 또 해준이 한 최대의 노력은 초급 중국어 교재를 편 것 뿐.


금지된 불륜이지만, 서래는 그런 이념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해준에게 끌리기 때문에, 해준의 말과 행동을 실제의 그것보다 더 좋은 의미로 받아들일 때가 많다. 반대로 해준은 품위 있는 남자다. 그리고 서래에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 상태였기 때문에 재회했을 때 서래의 행동을 모두 의심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다가오는 해준을 의식하며 돌아서서 스마트 워치에 대고 중국어로) 그가 온다. 오자마자, 이러려고 이포에 왔냐고 물을 텐데 어떡하지? 왜 자꾸 눈물이 나고 난리야, 송서래. 답을 말해야 하나? 아냐. 이미 그는 알고 있을지도 몰라. 묻지 않을지도 몰라.
이러려고 이포에 왔어요?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이런 상이한 마음가짐과 언어장벽이 합쳐져 슬픈 레파토리가 연출된다. 서래가 두 번째 남편의 시신을 씻어서 가지런히 둔 행위는 해준이 봤을 때 살인의 근거가 되고, 해준이 자신에게 실망해서 뱉은 말이 서래에게는 가장 중요한 고백이 된다.


두 번째로 영화를 보니까 해준이 서래를 떠나기로 한 것은 정말 서래를 향한 고백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실제로 서래가 차에서 전화를 하며,  해준에게 녹음 속 내용은 해준이 자신에게 고백하는 음성이라고 하자, 해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가 사랑한다고 했다고요? 언제요?" 라고 묻는다. 울분은 참는 표정으로 서래는 뱉는다. 해준이 영원히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해준은 그 날 사실 서래에게 배신감을 느끼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실망한 것이다. “붕괴”라는 표현을 봐도 그렇다. 폭발이 아니고, 파괴가 아니다. 폭발도, 파괴도, 외부의 세력이 쳐야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붕괴는 그렇지 않다. 타인이 붕괴시킬 수도 있지만, 스스로도 얼마든지 붕괴할 수 있다. 해준은 둘 중 어느 의미로 그 말을 했을까...


마지막에 서래가 죽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에는 완벽한 희생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얻은 구원을 보답으로 되돌려주는 가장 순수하고 종교적인 행위 말이다.

그런데 다시 보니, 서래의 자살 뒤에는 복합적인 동기가 있었다고 해석하게 되었다. 그 중 일부는 복수이다.


난 해준 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벽에 내 사진 붙여 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중국어를 번역앱으로) 날 떠난 다음 당신은 내내 편하게 잠을 한숨도 못 잤죠? 억지로 눈을 감아도 자꾸만 내가 보였죠? 당신은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날 밤 시장에서 우연히 나와 만났을 때, 당신은 문득 다시 사는 것 같았죠? 마침내.
(해준의 빰에 손을 대며) 이제 내 손도 충분히 보드랍지요?


서래가 자살을 하면 해준은 정말 붕괴 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 더 중요한 질문은 이거다 : 서래는 정말 자기가 자살을 함으로써 해준이 붕괴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난 서래가 복합적인 마음을 가졌을 것 같다.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는 해준이 꼭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길 바랐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해준의 영원한 미결 사건이 되길 바랐을 것 같다.


서래의 손아귀에 놓인 해준


난 그래도 이 두 캐릭터가 너무 안쓰럽고 이 영화가 너무 슬프다. 둘이 서로를 죽을 듯이 사랑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이런 복수심과 불신, 소통 장애라는 장치들은 캐릭터의 복합성에 더할 뿐이다.


다음에는 어떤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게 될까, 그리고 그 때는 또 어떤 해석을 하게 될까? 2022년 최고의 영화를 다시 보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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