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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Sep 10. 2023

순간이라도 찬란하길, 우리의 춤  

고집쟁이의 영화추천 (12) :  사랑은 비를 타고 리뷰

제목 : 사랑은 비를 타고

감독 : 진 켈리, 스탠리 도

연도 : 1952년

러닝타임 : 1시간 43분

이런 사람에게 추천해요! :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골든 에이지 할리우드 영화에 끌리는 사람, 무성에서 유성영화로의 전환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 아름다운 미장센을 중요시하는 사람, 변화하는 세상이 두려운 사람



똥손인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춤이고, 춤은 내가 만드는 것들 중 유일하게 결과가 남지 않는다. 

물론 영상과 사진과 기억과 꽃다발은 지워지거나 시들기 전까지는 남아있겠지만, 모든 몸짓은 태어나자마자 죽는다. 그래서인지 결과와 성취와 손에 잡히는 승리의 증거에 집착하던 지난 4년간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춤 공연을 한 번도 올리지 못했던 것 같다. 

이번에 처음으로 19년도부터 몸담았던 연세대 최고의 중앙재즈댄스 동아리 재즈필의 여름공연에 참여했다. 주중에는 일만 하고 주말에는 춤만 추는 나름 바쁜 일정이 날 깊은 잠에서 깨우는 느낌이었다. 지하철에서도 공연 곡을 흥얼거리며 무대를 구상했고, 금요일 밤이 되면 연습이 기대돼서, 일요일 저녁에는 6시간 동안 춘 춤을 반추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지금껏 얼마나 내게 솔직하지 못했던 것일까? 결과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등한시한 아름다움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 영화의 주인공, 그 유명한 진 켈리는 옛날 옛적에 고인이 되었고 2016년 여자 주인공 데비 레이놀즈의 사망을 마지막으로 주요 출연진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없다. 그들의 손짓과 탭댄스의 스텝은 멈춘 지 오래. 

그런데도 진 켈리가 우비를 입고 빗 속에서 한껏 고양된 표정으로 새로운 시작과 삶을 찬양하는 씬은 모든 댄서의 필수 시청 리스트에 포함된다. Singin' in the rain이라는 노래를 한 번도 못 들어본 사람은 없다. 

춤을 포함한 아름다운 것들은 휘발성이 강하지만 그만큼 내재된 힘을 갖고 있다.

빗 속에서 춤추는 진 켈리


주인공 돈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이다. 대중들에게 그의 여자친구로 인식된 백치미의 극치 라나와 함께 돈은 대사 없이 멋있는 표정으로 입만 뻐끔대면 되는 무성영화 시대의 배우이다.

평화로운 돈의 삶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킬 두 변화가 생긴다. 첫 번째는 난데없이 등장한 맑은 얼굴의 아름다운 캐시이다. 여러 오해로 인해 처음에는 서로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끝에 가서는 사랑에 빠진다. 두 번째는 1927년, 할리우드의 새로운 막을 연 첫 유성영화 Jazz Singer의 개봉이다. 이제 시네마의 판도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예쁜 얼굴뿐 아닌 듣기 좋은 목소리와 연기력 또한 필요해진 것. 

돈은 절친한 친구 코스모와 캐시의 도움으로 뮤지컬을 제작하기로 하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사랑과 꿈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리고 성공을 모두 지켜내는 데에 성공한다.


이 영화는 20세기 중반에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높은 제작 가치의 미국 영화들을 지칭하는 용어인 "골든 에이지 할리우드"의 영화인만큼 줄거리가 조금은 뻔하고 일차원적이다. 21세기의 시네필이 감상할 때에는 줄거리보다는 화려한 볼거리에 집중하게 된다.

나는 특히 10살 무렵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에서 처음 이 영화를 본 이후로 계속 Broadway Melody 시퀀스가 문신처럼 뒤통수에 새겨져 있다. 

이 시퀀스는 돈이 영화 제작사의 장에게 뮤지컬 영화를 제작하자고 설득하는 와중에 예시로 주인공이 선보이는 13분가량의 뮤지컬 넘버이다. 메인 줄거리와는 관련성이 하나도 없다. (가상 세계임을 숨기지 않는 그린 듯한 배경 백드롭이 그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핵심을 담백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 시퀀스는 대사 하나 없이, 젊고 희망찬 시골 젊은이 후퍼가 브로드웨이에서 춤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바탕으로 성공하려는 과정을 그린다. 


후퍼는 적절한 기회와 피나는 노력, 그리고 춤에 대한 변치 않는 마음이 합쳐진다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있다. 소속사, 그다음 소속사, 그다음 소속사를 찾아다니며 거절당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새로운 소속사에 문을 두드릴 때마다 노래한다. "Gotta Dance!"

소속사를 찾아다니며 재능을 쇼케이스하는 후퍼


파티에서 만난 초록색 드레스의 아름다운 여성(발레 백그라운드의 섹시하고 아름다운 배우 시드 차리스가 연기했다)과 긴장감 넘치는 춤을 춘다. 입을 맞출 것 같지만,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턱시도를 입은 남자가 값비싼 다이아몬드 팔찌로 그녀를 유혹하고, 그녀는 홀린 듯 후퍼를 버리고 남자를 따라간다.

여자의 옷은 초록색, 돈의 색이다. 이 장면은 후퍼에게 할리우드가 던지는 하나의 물음표이다. 돈과 성공을 위해서 예술에 대한 열정을 얼마나 희생하고, 원치 않는 길을 어디까지 걸을 수 있는지. 후퍼의 옷의 옅은 초록색 줄무늬는 답이 되기에 충분치 않다.


초록색 드레스의 여성과 춤추는 후터


후터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초록색 드레스를 입었던 여성은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연상시키는 옷을 입고 등장한다. 기존의 유혹적인 표정과 끈적한 춤이 아닌 순수한 표정과 정통 발레를 선보인다. 아무리 현실이 예상과 달라도 예술에 대한 후터의 사랑은 순수한 그대로 남는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치 않는 것들이 있듯이.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춤추는 여성

결국 후터는 그토록 원하던 성공을 손에 넣는다. 촌스러운 노란색 셔츠가 아닌 잘 빠진 턱시도를 입고 신사다운 표정으로 카메라를 향해 과거 자신의 주제곡이었던 "Gotta dance!"를 내지른다. 

가난하든 돈이 많든, 초라하든 성공하든 후터는 춤을 춰야 한다. 예술에 대한 열정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정신은 주변 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그대로다.

성공한 후터는 아직 춤을 춘다


주인공이자 감독이었던 진 캘리는 왜 본 스토리라인에서의 급격히 우회하면서까지 Broadway Melody 시퀀스를 고집했을까? 이 영화에서 진 캘리가 연기한 두 캐릭터, 돈과 후터는 둘 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할리우드 제1의 sweetheart으로 거듭난 그의 자아와 동일시할 수 있다. 

난 "사랑은 비를 타고"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는 "영구성"이라고 생각한다.

대중은 돈이 스타의 탄탄대로를 걸어왔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그의 커리어는 피나는 노력과 형편없는 과거의 산물이었다. 궁핍하던 시절 추던 우스꽝스러운 춤은 증발한다. 그 시절의 치욕을 모두가 잊을 만큼 춤이라는 행위는 빠르게 망각되고, 돈은 대신 새로운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그것을 덮었다. 하지만 새로운 과제를 마주하게 된다 : 유성영화의 등장으로 인해 무성영화 시대의 스타였던 돈의 찬란한 성과 또한 부끄러운 과거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잊힐 위기에 놓인 것이다. 

돈은 한숨 쉬며 얘기한다.

캐시, 난 예술가가 아니야. 그저 멍청한 쇼를 선보이는 사람이지, 그림자에 불과해. 난 이제 그걸 알아.

이런 허무함은 별다른 목적성 없이 작곡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려본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공하거나 인정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가 없기에 하는 일이다.

Broadway Melody 시퀀스는 진 켈리의 일대기를 압축함과 동시에 그가 추구하는 예술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춤 경험이 없는 신인이었던 진짜 여주인공, 데비 레이놀즈를 혹독하게 혼내고 못마땅해했던 진 켈리가 이미 실력이 증명된 시드 채리스를 여주인공으로 선택한 것부터, "우리 진 켈리하고 싶은 것 다 해~"의 냄새가 난다) 특히 순백의 시대 채리스의 치마를 실내 스튜디오에서 하늘로 날리기 위해 그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 선풍기를 사용한 점에서 이 시퀀스에 대한 진 켈리의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난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울컥한다.




예술은 어쩌면 순간적이고 남는 것 없는 허무한 행위일 수도 있다.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해야 할 일들'을 제쳐두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수단으로 여겼던 시기도 있다.

이 영화는 정말 중요시해야 하는 것들, 억겁의 시간이 지나고도 남는 정말 영구적인 것들은 예술이라고 역설한다. 돈과 성공과 순수한 열정과 욕심과 사랑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만의 유니크한 균형을 찾은 진 켈리가 깨달은 정답이 13분의 시퀀스에 녹아 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삼만 년의 예술의 역사동안 인간은 발레 동작을 하려고 다리를 찢고, 손에 피가 나게 현악기를 뜯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렀던 것일까? 역사 그 어느 시기에도 노래는, 춤은, 연기는, 소설과 연극은 인류와 함께했다. 


내일이면 나의 성공이 실패로 바뀔 수도 있고, 급격하게 변동하는 사회의 흐름 속에서 내가 발을 디딜 곳이 사라질 수 있지만 내가 감탄하며 감상한 춤은, 거울 앞에서 몇 시간이고 수정했던 안무는 한순간 존재했고, 그 사실은 영구히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다른 형태라도 본질은 흐려지지 않는다. 


순간이라도 찬란하길 바란다, 우리의 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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