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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Jan 02. 2024

미련과 후회의 차이

고집쟁이는 교환학생 (1): 출국 일주일 전

"예지야 큰일 났어! 얼른 이리 와 봐."

아이라인을 그리다 말고 허겁지겁 거실로 나와보니 엄마가 화분 앞에 앉아계셨다.

"여기 앉아 봐."


작은 세상에서는 나름 우거진 초록 속에 두 개의 검붉은 꽃봉오리가 게슴츠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정말 큰 일인 줄 알고 흥분했던 나는 엄마를 장난스럽게 째려보고 옆에 앉아 그 빨강을 들여봤다.


"예지 파리 갈 때까지는 활짝 폈으면 좋겠다."


TV장 앞에 놓일 때만 해도 다른 식물들과 차별점이 없었는데, 꽃송이 두 개 핀 게 뭐라고 갑자기 특별해졌다. 다른 꽃들이 봄에 화사하게 피어날 때, 혼자 고집스럽게 겨울에 피는 동백꽃이 갑자기 25살이나 먹고야 교환학생이 된 나 같아서 미워졌다.


교환학생을 준비하는 과정도, 떠나기 직전의 지금도 후회와 미련으로 점철되었다.


사실 난 2년 주기로 교환학생을 신청해 왔다.

교환학생 생활에 대한 로망이 컸던 만큼 1학년이 끝나자마자 21살, 누구보다 먼저 교환학생 신청을 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취소되었다.

그다음에는 23살에 파리 교환학생을 신청했는데, 회계사 시험을 준비해야겠다는 이유로 파견을 포기했다. 돌이켜보면 주변 친구들이 앞을 보고 달릴 때 파리에서 바게트나 먹는 상상조차 두려웠던 것 같다.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다짐하며 당당하게 시험에 진입했다.

그리고 보기 좋게 떨어졌다.


시간이 아깝다며 취소한 교환학생을 25살이나 되어 진짜로 가게 되었다. 기분 나쁘게 두근거린다.

뉴턴의 작용 반작용 법칙은 물리 세상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려고 밀치면 밀칠수록 보이지 않는 힘이 이마를 꾹 누르며 제자리에 있으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프랑스 출국 두 주 전부터 이상하게도 악재들이 겹겹이 몰려왔다.

중요한 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특성에 대해 비판을 들었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고, 가까운 사람에게 보는 내가 가슴이 갑갑할 정도로 힘든 시기가 찾아왔다. 모든 의욕이 스멀스멀 몸을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성실한 생활 습관에 자부심을 갖던 나였는데, 지하철에서 책 읽기가 귀찮아서 계속 인스타그램 릴스나 보는 모습이 너무나 한심했다.


그런데 원래 시작이 그렇다. 지나간 것들을 충분히 곱씹고, 최대한 노력을 한 후 완전히 놔줘야 한다. 그래야지 오르페우스의 비극적 운명을 면할 수 있다.


새내기 시절,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미련과 후회의 차이는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이해하기 쉽다. 다시 돌아갔을 때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 같으면, 이 감정은 후회다. 후회되는 일은 깊숙이 고민하고 반성해서 다시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할 것 같다고 느껴지면 그 감정은 미련이다. 흘려보내야 한다.


난 이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돌아갔을 때의 내가 지금의 나인지 그 때의 나인지에 따라 답이 달라질 것 같다고 느꼈다. 내가 더 큰 사람이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더 영악한 사람이었다면 지금보다는 마음이 편했을까?


새해 목표는 프랑스에 가서 지금보다 따뜻한 사람, 더 건강한 사람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척추를 펴고 당당하고 솔직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세상을 대하고 싶다.


인턴십에서 배웠던 것들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친구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파리지앵으로서의 첫 일주일을 조금씩 계획한다.

후회도 미련도, 억울한 마음도, 걱정 원망도 충분했다. 이제 잊자.


지금은 피어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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