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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Jan 13. 2024

"프랑스인은 개가 아니야!": 프랑스어 교수님께 혼나다

고집쟁이는 교환학생 (5): 보아포, 퐁피두 센터, 그리고 프렌치 인종관

퐁피두 센터의 알록달록한 관들을 통과하며 원하는 전시장으로 흘러갔다.

입장 목적에 따라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20세기 건축의 정수로 꼽히는 퐁피두 센터는 뼈대가 건물의 밖에 얼기설기 붙어 있는 특이한 형태를 가졌는데, 핵심 설비를 밖으로 빼내어 더 넓은 실내 공간을 확보한 하이테크 건축의 정수다.


이동수단은 빨간색, 전기시설은 노란색, 공조시설은 파란색이라는 귀여운 규칙으로 지어졌다.

붉은 관 속 에스컬레이터을 타고 올라가면 "주토피아"나 "엘리멘탈" 같은 디즈니 영화의 엑스트라가 되어 거대한 생명체의 혈관이나 신경 시스템을 탐험하는 기분이 든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면 상시 전시관이 나온다!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은 상징적인 건물 하나로 본인의 이름을 수많은 관광객의 뇌리에 새긴 것은 물론, 당시 영국과 스페인보다 뒤로 밀려나던 프랑스 현대미술의 위상을 (억지로) 영구히 높였다.


EU 국가의 학생이라면 5층의 상시 전시관은 언제나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무료 전시라서 mmca처럼 생소한 예술가들 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정말 놀랐다.

잭슨 폴록, 프리다 칼로, 몬드리안,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등 예술사 책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알 만한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너무나 캐주얼하게 진열되어 있다.


내가 예전부터 좋아하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trois figures dans une pièce도 실제로 봤다.. 영상이나 사진으로 보는 거랑 비교도 안되게 울렁거렸다.

자살한 애인의 마지막 모습을 몇 십 번 그려낸 베이컨

유명하신 분들의 작품도 많았지만, 이 날은 새로운 작가 한 명의 작품이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다.


Belinda Ade Kazeem-Kamiński with a Purple Lily Fan, 2020

아모아코 보아포는 84년생 가나 생 화가 겸 비주얼 아티스트이다. 이름이 익숙하다 싶었는데, 알고 보니 한동안 디올의 비주얼 디렉터였다.


하늘색 배경은 비교적 평화롭게, 그리고 일관되게 칠해졌으나 주인공의 피부, 특히 혼이 담긴 눈이나 숨이 통하는 코와 입 주변은 수개의 색이 어지럽게 뒤섞이며 꿈틀댄다.

보아포는 캔버스 위로 붓이 아닌 손가락을 문지르며 패턴을 만들어냈다. 처음 이걸 봤을 때는 틀림없이 작가의 애인을 그린 작품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물감으로 혼을 그려내는 과정이 너무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아니고.. 보아포는 수백 명에 대한 수백 개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특히 그가 그린 주인공들이 거의 모두 흑인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그의 인터뷰에 빠지지 않는 질문이다: 대체 왜 흑인들만 그리나요? 그리고 언제나 바뀌지 않는 답이다: 제가 가나에 있었을 때에는 아무도 이 질문을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비엔나에 온 이후로 이 질문만 받네요.




이번주 월요일부터 Intensive French Seminar을 시작으로 교환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웰컴위크가 시작되었다. 나는 기초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어서 세미나를 신청했다. 무심하게 부스스한 머리에 심각한 담배 중독,  출근길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전형적인 프렌치 교수님을 배정받았다. 그리고 목요일에 그 교수님께 크게 한 소리를 들었다.



숙제 중 하나였다. "한국과 프랑스의 차이"라는 주제로 다섯 개의 문장을 프랑스어로 써 와야 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문제의 문장을 발표했다.


"il n'y a qu'une seule race en Corée, mais il y a plusieurs races en France."

(한국에는 한 가지 인종밖에 없지만, 프랑스에는 다양한 인종이 있다.")


교수님께서는 화들짝 놀라시며, 프랑스에서는 절대 "race(인종)"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하셨다.

꼭 써야 한다면 "group ethnique(에스닉 그룹)"이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프랑스 사람들은 개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잖아! 그럼 race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거야."




6개월 전, 프랑스 경찰에게 오해를 사 잔인하게 살해당한 알제리계 남자아이가 떠올랐다.

평범한 청소년이었으나 소수인종이라는 이유 하나로 어이없게 총을 맞았고, 비백인 프랑스는 격분했다. 거리의 상점을 부수고 불을 지르는 등 폭력적인 시위가 이어졌고 이로 인해 다소 쉬쉬대던 주제인 프랑스 내 인종 문제에 대한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본질적인 정신 중 하나인 "똘레랑스(관용)"는 무관심을 기초로 하기에, 유사하게 다양한 인종이 뒤섞인 미국과 다르게 인종 문제를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간 인종 문제는 미국의 고유한 것으로, 프랑스에는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마크롱은 인종 문제는 "미국에서 건너온 못된 산물"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지하철에서도 다양한 인종들이 섞여있다


심각한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지만, 없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아무리 눈을 가리고 인종이라는 구분이 없는 것이며,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격 떨어지는 방식이라고 믿고자 하더라도 여기서 일주일 살아본 나조차 인종별로 받는 대우가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5유로짜리 피자나 케밥을 파는 길거리 음식에는 흑인들과 중동 사람들밖에 없다.

늦은 밤 해피아워에 동네 레스토랑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며 와인과 테린느를 즐기는 사람들은 다 백인이다.


대대로 이어지는 부의 대물림, 그리고 필연적인 인종 내 생활 방식의 재생산이 필연적인 것이며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는 개인의 자부심이나 자조는 인정할 수 있지만, 공동체적 차원에서 이런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 것은 무책임하고 조금은 폭력적이라고 느꼈다.




보아포의 지극히 프랑스적인 인종관에 대해 읽으며 조금은 양가적인 감정이 생겼다.


먼저, 흑인의 초상화라는 특이한 주제에 끌려 그림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내 안에도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또한, 자신의 예술을 예술로만 봐달라는 보아포의 바람과 달리, 그의 성공을 최근에 유행한 BLM 운동을 비롯한 인종적 쿼터제의 일부로만 치부하는 세력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주장인지 고민해보게 되었다.


"없는 문제"를 "심각한 문제"로 바꾸려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서 지내는 동안, 아웃사이더인 나도 함께 고민해 볼 것 같다!



가까이서 보니까 후안 미로 작품 너무너무 좋더라.. 더 찾아다닐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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