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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Jan 19. 2024

쇼콜라 쇼 먹으면서 똥 얘기하기

고집쟁이는 교환학생 (7): 안젤리나, 오랑주리 수련 연작, 오드리 헵번

뷰티 팁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50년대의 유명 여배우 오드리 헵번은 이렇게 답했다.


매력적인 입술을 갖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하세요


사랑스러운 눈을 갖고 싶다면:

사람들의 좋은 면을 보세요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다면:

배고픈 자들과 음식을 나누세요


아름다운 머릿결을 갖고 싶다면:

매일 한 번씩 어린아이가 어루만지게 해 주세요


우아한 자세를 갖고 싶다면:

절대 이 세상을 혼자서 걸어 나가고 있지 않다는 믿음을 가지세요


사람들은 그 어떤 물건보다 소중하게 아껴야 합니다. 어떤 인연도 포기하지 마세요.


중학생 때 "로마의 휴일"을 본 이후부터 오드리 헵번에 대한 집착이 시작됐다.

새내기 때부터 내 인스타그램 프로필은 햅번의 옆모습 사진에서 변한 적이 없고, 지금도 내 방에는 티파니 매장 앞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크루아상을 먹는 그녀의 포스터가 붙어 있을 정도로.


마침 파리의 한파가 잦아들기 시작한 화요일, 이 도시를 사랑한 수많은 아티스트 중 한 명인 햅번의 단골 카페에 방문했다. 평소에는 튈르리 정원 앞 횡단보도의 가장 끝까지 대기자가 줄 서 있는 Angelina인데, 평일 점심이라 그런지 바로 입장할 수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매장 내부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부드러운 버터 냄새, 접시에 포크를 부딪히며 내는 경쾌한 금속 소리, 그리고 고풍스러움과 세련됨이 공존하는 인테리어에 행복해졌다.

현지인과 관광객이 적절히 섞인 고객 비율을 보니 기대감이 더 높아졌다. 관광객이 몰릴 정도로 유명한 동시에, 현지인들이 피하지 않을 정도로 맛있다는 뜻이니까!


캐나다에서 온 H와 나는 영화, 음악, 미술관, 그리고 음식에 대한 사랑을 공유하면서 가까워졌다. 우린 가장 유명한 Mont-Blanc, 시즌 메뉴인 Délice noisette choco-café, 그리고 곁들일 chocolat chaud와 Angelina tea를 주문했다.


Mont-Blanc는 안젤리나의 시그니쳐 메뉴이다. 1층은 바삭한 머랭 쿠키, 2층은 거의 단 맛이 없는 순수한 생크림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는 짤주에 marron(밤) 크림을 담아 몽블랑 산맥을 닮도록 올려준다. 세 층 모두 맛이 비슷해서 조화로웠지만, 진한 밤 맛보다는 달달한 설탕 맛이 먼저 느껴져서 아쉬웠다.


Délice noisette choco-café는 바삭한 곡물이 포함된 타르 트지 위에 다크, 밀크, 화이트 등 다양한 질감과 맛의 초콜릿 무스를 올리고 위에는 금가루까지 올려서 마무리한 디저트였다. 페레로로쉐를 세 배 증폭시킨 맛이었다. 추천한다!


Angelina tea는 재스민 향을 덮어버리지 않는 은은한 꽃 향기가 좋았다. 디저트와 잘 어울렸다.


그리고 문제의 chocolat chaud. 직역하면 "뜨거운 초콜릿, " 그러니까 핫초코라는 뜻이다. 파리에 와서 쇼콜라 쇼를 주문하고 우리가 아는 부드러운 초콜릿 우유를 상상한다면, 한 입 맛보는 순간 충격받을 것이다. 프랑스의 쇼콜라 쇼는 롯데에서 파는 88% 카카오 초콜릿을 그대로 녹인 맛에 더 가깝다. 그리 달지 않고 엄청나게 진해서 뜨겁고 달콤한 진흙탕을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난 원래도 쓴 초콜릿을 좋아하는 편이라 계속 홀짝댔지만, H는 조금 먹더니 진한 눈썹을 찌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포기했다.


"초콜릿을 고체 형태로 먹게 되기 전에, 애초에 카카오는 음료로 먹기 시작한 것 알아?

기원전 1000년쯤에 마야인들이 카카오빈을 갈아서 고춧가루 같은 거랑 섞어서, 컵 두 개 사이로 왔다 갔다 부으면서 부드러울 때까지 섞었대. 그때는 풍요를 기원하는 종교적 의미가 더 강했고.

지금 먹는 이 쇼콜라 쇼 정도로 진했을까? “


쇼콜라 쇼가 담긴 주전자를 쳐다보며 장난식으로 얘기했다.


아즈텍 족은 마야인들의 핫초콜릿을 자신들의 xocolatl로 만드는 과정에서 바닐라 빈을 추가했고, 유럽인들은 아즈텍 족을 약탈해 쇼콜라 쇼로 만드는 과정에서 설탕을 추가했다.

사약처럼 걸쭉하고 썼던 종교적 도구가 휴게소 자판기에서 뽑아 먹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핫초코가 될 때까지 얼마나 다양한 사건들로 얼마나 급격히 변주되었을까?


난 쇼콜라 쇼가 파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파리는 패션, 자연, 미술을 사랑하는 도시다. 그런데 당연히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가장 자랑스러운 장점들은 사실 가장 숨기고 싶은 흑역사로부터 파생됐다.


le bon marche에서 발견한 페라가모 플랫


아주 유명한 얘기인데, 하이힐이 프랑스에서 발명된 계기는 그들의 심각한 위생 문제였다. 변기나 수도 시스템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15세기 프랑스에서는 똥오줌을 요강에 모아 창문 밖으로 버리는 일이 흔했다. 길거리에 작은 강물처럼 흐르는 오물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면적을 밟는 스틸레토 하이힐이 발명되었다.


오물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한 하이힐을 포함한 럭셔리 시장은 이제 유럽 경제의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전 세계 USD 280.92Bn 럭셔리 시장 규모 중 USD 45.36Bn의 매출이 손바닥만 한 유럽에서 파생되고 있다.



튈르리 공원에서 대화하는 연인 한 쌍


도시를 걷다 보면 수많은 공원들이 눈에 띈다. 서울에서는 아파트 숲 속에 시공사가 선심 쓰듯이 넣어준 조그만 놀이터에 감사해야 하지만, 여긴 동네마다 잔디가 깔린 근린공원이 있다.

파리지앵들은 느지막이 외출해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늦은 점심을 즐긴다.


19세기에 유럽 전역에 콜레라가 유행하며 드디어 현대적 도시 설계가 시작됐다. 빽빽하게 늘어선 주거시설, 그리고 정비되지 않은 도로들이 전염병의 확산을 촉진했기 때문이다.

조르주외젠 오스만은 나폴레옹 3세의 명령 하에 도시를 재설계했고, 그 과정에서 파리의 지하철, 구, 건축 시스템은 물론 전염병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민들이 상쾌한 바람을 맞고 산소를 충전할 수 있는 공원들을 구상했다.


오랑주리 미술관, 모네의 수련 연작

당연히 12세기 중반정도부터 시작해 프랑스는 역사가 오래되고 풍부한 미술사를 자랑했지만, 20세기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 시기에 프로파간다로 이용된 모네의 수련 연작이 떠올랐다.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국무회 의장 조르주 클레망소의 입장에서 미술은 독일의 바바리즘으로부터 프랑스의 가장 고귀한 정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였다. 수련 연작은 프랑스에 대한 모네의 의무였다.


클레망소는 모네와 개인적으로 깊은 친분을 갖고 있었다. 로댕 미술관을 지어서 로댕을 별로 안 좋아하던 모네의 경쟁심을 자극하는 등, 정치적 노련함을 동원하여 시력을 잃은 후 13년간 붓을 놓은 모네가 그 유명한 수련 연작을 그리도록 설득한다.


수련 연작은 그저 아름다운 자연을 그린 8부작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전쟁의 참혹함과 죽음의 두려움을 담은 걸작이다.

두 친구의 동상이몽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지만, 인상주의는 프랑스의 자랑 중 하나가 됐다.



쓴 맛을 걷어내고 달달해진 쇼콜라 쇼, 똥오줌에서 발전한 럭셔리 시장, 콜레라를 피하려고 설계된 공원, 국수주의가 탄생시킨 수련 연작.


그 역사는 영구하지만 그 결과 또한 영구하다.

이제 더 이상 프랑스의 패션, 공원, 예술을 보고 똥오줌, 콜레라, 국수주의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흑역사가 없는 일이 되진 않지만, 그 흑역사가 없었다면 지금의 파리가 있었을까?


고전 여배우에 굳이 빗대어 보면 내 매력은 오드리 헵번보다는 도리스 데이나 메릴린 먼로와 더 비슷한 점이 많다. 마른 몸이 아닌 굴곡 있는 체형에 가깝고, 침착하고 우아하기보다는 당돌한 성격이며, 모호한 미소보다는 활짝 웃을 때가 더 잦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동경하고 닮고자 하는 이유는 그녀의 과거와도 연관이 깊다.


세계 2차 대전의 피해자기도 했던 어린 오드리 헵번은 튤립 뿌리를 먹으며 허기를 채울 정도로 괴로운 시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에 영양실조 상태로 너무 오래 지낸 탓에 노년기까지 정말 마른 체구를 유지했는데, 그녀는 깡마른 자신의 몸을 정말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거울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고. (기만자...)

하지만 여리여리한 체형은 당시 유행했던 글래머러스한 여배우들 중 햅번이 돋보이게 만들어줬고, 마네킹과 같은 몸을 선호하는 럭셔리 디자이너들에게 사랑받게 해 후년에는 패션 아이콘이 되었다.


발레리나였던 햅번은 발레 공연을 열어 자금을 모아 비밀리에 안티-나치 운동을 도왔다. 거친 사람들과 지내며 담배도 배우고, 친한 친구들에 의하면 입담도 꽤 거칠었다고 한다.

그녀만의 과거에서 비롯된 매력이 감독에게 통했고,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로마의 휴일"에 캐스팅됐다.

 담배 애호가였던 오드리 헵번

단점일 수 있었던 과거의 행적을 자신만의 무기로 승화시킨 오드리 헵번.

후년에는 전 세계 오지를 떠돌며 처참한 상황에 놓인 어린아이들을 돕는 데 노년기를 바친 그녀의 아름다운 영혼이 만들어지기 위해 고통과 실수는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나도 쇼콜라 쇼가 되고 싶어졌다. 최근에 발견한 나의 단점들을 화려하고 자랑스러운 장점들로 바꾸고 싶다. 쇼콜라 쇼처럼, 오드리 헵번처럼, 그리고 내가 정말 사랑하는 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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