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앙떼뜨망 Feb 28. 2024

내가 안고 사는 이 슬픔은 그대에게서 받은 것

고집쟁이의 유럽여행 (포르투갈 3): 포르투, 파두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 장르, "파두" 공연장에 방문했다.


공연장에 들어서자 한 명당 한 잔씩 나눠 준 웰컴 와인에서는 복분자주나 한약에서나 맡을 법한 진한 단 향이 났다. 작은 모금으로 마셔도 금방 취할 것 같아 혀 끝으로 입구를 막아가며 조금씩 아껴 마셨다.



어두컴컴한 방에 듬성듬성 2인용 테이블들이 놓여 있었고, 정 중앙 아주 작은 무대에 스탠딩 마이크, 그리고 그 양 옆에 의자가 하나씩 위치했다.


눈썹이 두껍고 통통하신 남성 한 분은 기타를 들고 오른쪽에 앉았고, 마르고 안경을 낀 남성은 왼쪽에 앉았다. 손에는 악기 하나를 들고 있었다. 기타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한눈에 봐도 몇 가지 차이가 보였다. 보통의 기타에 비해 현저하게 작았고, 기다란 타원형으로 생겼으며, 손잡이 쪽으로 갈수록 두께가 좁아지는 형태였다.


이상한 악기의 주인이 기타를 든 남성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방에 앉은 모든 생명체가 숨을 동시에 멈춘 것 마냥 검은색 긴장감이 좁은 공연장을 덮었다. 태풍 직전의 침착처럼, 첫 키스 전 침묵처럼.


경쾌한 동시에 구슬픈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귀에 익은 기타의 선율 위로 생소한 사운드가 들렸다. 사람의 목소리처럼 얇고, 현악기에서 나온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연속적인 음성이었다. 그 악기는 나중에 물어보니 "포르투갈 기타, " 또는 "파두 기타"라고 불리는 악기였다.


15세기부터 포르투갈이 식민지를 정복하며 여러 문화가 정복되는 동시에 포르투갈 전통문화에 흡수되고 전염되었다. 특히 아프리카, 브라질 지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 음악은 브라질 흑인들의 댄스 음악 룬두와 포파, 모디냐라는 보컬 장르, 스페인의 판당고 댄스 음악, 중부 아프리카, 아랍 음악의 특징을 닮아갔고, 파두(Fado)라는 장르가 탄생했다.


19세기 초반 리스본의 알파마 거리에는 아프리카와 브라질 혼혈들이 많이 살았는데, 주로 대부분 빈민층에 속했던 그들이 파두를 불렀다고 한다.

노래의 주제는 슬프게도 항해를 하는 뱃사람의 고통, 그들을 기다리고 걱정하는 가족, 애인들의 고뇌. 하류층끼리 이 감정을 나눌 목적으로 파두 모임이 만들어졌고, 이런 모임들을 통해 그들은 연대감을 쌓았다.

1920년대부터 도시의 중상류층을 겨냥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파두를 전통 음악 장르로 마케팅하기 시작하며 파두는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하고 전통 음악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다.




기타 이중주가 마무리되었다. 관객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한 여성이 등장했다.

이목구비는 부드럽고 여성스러운데 턱이 각지고 눈썹이 짙어서 묘한 인상을 줬다. 어깨 위로 두른 숄에 차르르 달린 태슬들이 그녀의 작은 움직임에도 쉴 새 없이 찰랑거렸다.



파두는 우리나라의 판소리나 창처럼 리듬이 단순하고 타악기가 절제되었으며, 가수의 목소리가 주인공인 장르이다.

그녀는 손가락을 까딱거리거나 눈을 깜빡이는 것만큼 쉽게 자유자재로 성대를 조절할 수 있었다. 음정을 위아래로 넘나들거나 음을 꺾을 때 목 정 중앙의 근육이 수축되고 이완되는 것이 실시간으로 눈에 보였다.

거의 절규하고 애원하듯이 노래를 불렀다. 기타의 멜로디에 맞춰서 노래를 부른다기보다는, 감정을 쏟아내고 기타에게 공감을 구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 노래의 제목이 궁금해서 공연이 끝나고 물어봤다. 파두의 대표적인 노래 중 하나인 "O Gente de Minha Terra(오, 내 땅의 사람들)"이라고 대답했다.


이 파두는 너와 나의 것

아무리 거부하려고 해도 기타 선율 위로 우리를 묶은 운명

노래하는 기타의 신음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대는 길을 잃고 울 것 같을 거야


아, 내 땅의 사람들

이제 난 깨달았어

내가 안고 사는 이 슬픔은 그대에게서 받은 것이라는 걸




우리나라 판소리가 굿판에서 무당이 읊조리는 노래를 재해석하며 탄생한 것처럼, 왁킹이나 보깅 같은 스트릿댄스 장르들이 LA 게이 클럽 내 움직임에서 비롯된 것처럼, 상당히 많은 예술 장르들은 사회 하층민, 또는 소외된 계층들끼리 향유하던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


예술은 대부분 아름답고, 아름다움은 슬픈 사람들이 더 잘 알아보기 때문이 아닐까?


일상을 버리고 신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무당들의 한, 당당한 태도로 혐오에 맞서야 했던 성소수자들의 일탈, 그리고 가족과 애인이 파도의 분노를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조금도 예상할 수 없었던 포르투갈 사람들의 괴로움은 각 문화권의 정서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아 후대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파두는 포르투갈어로 "운명"이라는 뜻이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언젠가는 오게 되어 있는 슬픔, 운명의 순간이 오면 그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사람들.


그대에게서 받고, 내가 안고 가는 200년 전의 그 슬픔이 2024년의 관객들에게 같은 문법으로 전달되진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나는 이 공연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독한 와인의 마지막 모금을 마무리하고 열심히 박수를 쳤다.

작가의 이전글 캐나다 친구들이랑 알프스에서 스키 타다가 피 난 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