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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Mar 02. 2024

나였던 것, 나일 수 있었던 것, 내가 될 수 있는 것

고집쟁이의 세계여행(모로코 2): 사하라 사막

"Djuna, could you climb up any slower? Come on, take your shoes off or something! (쥬나, 더 빨리 못 올라와? 신발이라도 좀 벗어 봐!)"


헤일리가 언덕 꼭대기에서 소리 질렀다.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지는 중, 하늘은 어두웠다. 헤일리와 나는 몰래 빠져나와 거대한 사막 언덕들 중 하나를 등반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봤다. 텐트로 이루어진 숙소, 그리고 캠프파이어와 나 사이에 이십 미터 정도의 고도 차이가 벌어졌다. 캠프파이어에서 북을 치며 춤추던 관광객들과 투어 가이드들은 서서히 장비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시끌시끌하던 잡음이 캠프파이어의 마지막 불씨처럼 흐려지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선명하게 흐드러진 수백 개의 별들.



"I'm trying! Give me one second.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봐.)"


차가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로 미끈하게 계속 빠져나갔다. 입자가 곱고 감각이 차가워서 만져보면 젖어 있을 것만 같았는데, 발을 바닥에서 빼기만 해도 스르륵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다.

초등학생 때 해운대 해변가에 서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멍 때린 채 고개를 숙이고 내 발등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허겁지겁 내 무릎까지 밀치고 들어왔다가, 점점 작아지는 흰 거품을 내며 발가락 사이사이의 경로로 도망치는 파도를 이해하고 싶었다. 

세상에 가만히 있는 건 거의 없구나, 하고 신기해했다.


분명 십오 년 전에는 세상 곳곳의 끊임없는 변화가 흥미롭고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나는 열 살 먹은 손예지보다 어리석은 것 같다. 발전 없는 변화가 너무 싫다. 

마치 어린이용 교육방송처럼 모든 에피소드 끝에 교훈이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사실 어떤 불행은 교통사고 같고, 어떤 행복은 노력하지 않아도 선물처럼 내게 오고, 어떤 권태는 그냥 존재할 텐데.


동시에 그저 좀 서운하기도 하다.

정말 모든 건 변해야만 하는 것일까? 지금의 나는 최선의 나인가? 돌이켜보니 순간의 진심만큼 가벼운 게 없다.

난 요즘 "내"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너무 잡생각이 많아져서 잠깐이라도 시간을 멈추고 싶다.


모래 밑으로 다리가 푹푹 꺼지는 탓에, 언덕 꼭대기에 도착하니 엉덩이랑 허벅지의 근육이 땅겼다.

헤일리 옆에 풀썩 앉았다. 


별이 가득한 하늘을 천장 삼아 떠들었다. 십오 분 정도 떠든 후에는 음악을 튼 채 서로를 밀치고 장난치며 모래 위로 미끄러져 내려갔다가 다시 힘들게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낮에는 태양 때문에 땀에 젖었는데, 밤에는 바보 같은 장난으로 송골송골 땀방울이 솟았다.



전 세계의 3분의 1 정도가 사막이라는 사실을 그전까지는 몰랐었다. 

사막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투어에서 배우게 됐다. (문과 티 내기)


엄청난 일교차로 인해 바위에 압력이 가해지고, 그걸 이겨내지 못하는 임계치에 다다르면 큰 조각으로 부서진다. 또, 비가 자주는 오지 않지만 아주 가끔 "돌발 홍수"라고 불리는 폭우가 뜨거운 바위에 쏟아지면 그 큰 조각들이 더 작은 바위들로 조각난다. 그 후, 힘을 약화시킬 나무도 없는 상태에서 강한 바람이 작은 바위들을 쓸고 지나가며 둥글둥글한 모양을 만들고, 고운 모래로 다듬어진다.


바람은 모래를 쓸고 지나가 지렁이 같은 패턴을 만든다. 낙타를 타고 40분 정도 사막으로 이동할 때 실컷 구경했다.



큰 굴곡 없이 살긴 했으나 나도 나름 부서졌었고, 조각났었고, 다듬어졌었다.

근데 왜 부서지고 조각나고 다듬어지기 전의 내가 그리울까? 자꾸 "~면"으로 끝나는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고장 난 라디오처럼 반복재생한다.

그때 조금 더 노력했다면, 이 사람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신경 썼다면, 덜 신경 썼다면,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결심을 했더라면...


나였던 것들이 그립고, 내가 될 수 있었던 것들이 아쉽다.

그리고 무섭다. 앞으로 올 변화들과 내가 할 선택들, 그리고 내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면 옛날에는 기대만 됐는데 요즘은 덜컥 겁부터 난다. 

이 감정이 곧 지금의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것들 중 최선의 내가 아니라는 증거 같아서 슬프다. 




얼마 전에 흥미로운 글을 하나 읽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공존한다. 


외계인이 멀리서 지구를 관찰하면 당연히 지구 표면의 1/3을 덮는 사막부터 볼 테지만, 중요한 점은 지금. 2024년 3월 2일의 지구를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몇십 광년 떨어진 곳까지 빛의 이동은 지연된다. 정확히 어디에 그들이 사는지에 따라 중세 시대를 볼 수도, 공룡이 살던 시기를 볼 수도, 정말 지구라는 행성이 탄생하는 순간을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외계인들에게 인지되는 현재는 우리가 인지하는 과거인 것이고, 그 현재와 과거는 같은 것이라는 의미다. 

그럼 지금 나의 현재도 어딘가에서는 나의 미래라는 뜻이지 않을까?


초등학생 시절 나의 발가락을 빠져나가던 파도도, 모래가 다듬어지는 과정도, 내가 될 수 있는 것도 정해져 있을까?

위로되는 동시에 이상한 반발감이 드는 가설이다. 머리 양 옆에서 자유의지와 운명이라는 악마와 천사가 싸우는 기분이다. 자유의지라는 개념과 사이 좀처럼 끝나지 않는 애증의 관계!




텐트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다시 낙타를 타는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사막 언덕 위에 올랐다.

사하라 사막에는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이 하나도 없어서 일출 때의 태양이 텔레토비 해님처럼 뿅! 하고 올라온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웠던 일출


자연 앞에서 작아진다는 표현이 자주 쓰이는 이유를 알겠다. 이 생경한 광경 앞에서 잠시지만 다시 고등학생 때의 운명론자로 돌아갔다.


변화는 본질적으로 괴롭다. 하나의 선택으로 인해 나일 수 있었던 무한한 것들이 죽는다. 그들을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그 가능성에 현혹되어 아쉬움을 그리움으로 착각한다.

머리로는 아는데... 난 아직 덜 컸나 보다. 사막과 일출이 내 두려움을 마법처럼 치유해 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시 파리로 돌아와 글을 쓰며 해운대에서 파도를 이해하려고 들던 어린 여자아이를 그리워한다.


그래도 답은 시간이라는 걸 알고는 있다. 내가 있는 것들을 맞이할 진짜 용기가 생길 때까지 압력에, 폭우에, 바람에 나를 맡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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