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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떼뜨망 May 05. 2024

불변의 무게중심

고집쟁이의 유럽여행(스페인4): 그라나다, 산 미구엘 전망대, 황금 나선

나이가 들수록 내면의 변화는 선형이나 계단형이 아닌 나선형이다.


성장은 허상이 아닐까?

예전에는 짙은 인상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요즘은 최대한 흔적 없이 살고 싶다.


자연에서 흔히 발견되는 나선형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아르키메데스 나선형은 전 항에 1을 더하며 증가한다. (ex. 1, 2, 3, 4...)

이에 비해 황금 나선형은 피보나치수열로 증가한다. 즉, 수열 내부의 값을 더하며 스스로 누적된다. (ex. 1, 1, 2, 3, 5, 8...)



좌 황금 나선형, 우 아르키메데스 나선형


새로운 자극과 경험들은 내게 겹겹이 쌓여 황금 나선형의 형태로 자기누적된다.

점들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쌓여 면이 되는 것처럼, 평평한 지구를 직선으로 걷다 보면 언젠가는 제자리에 오는 것처럼. 


방향성을 갖고 나아가고 있다고 확신하다가도 어디까지 왔나- 되돌아보면, 시작점과는 거리가 벌어졌지만 직선으로 뛰었다면 한참 전에 도착할 수 있었던 거리다. 수개월 전의 나와 전혀 공통점이 없는 것 같기도, 소름 돋게 유사하기도 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나는 요즘 정말 게으르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이 보는 풍경. 


집 앞 개인 테라스에 앉아 멍 때리며 앨범 몇 개를 연달아 듣는다.

얼굴에는 마스크팩, 머리카락에는 헤어팩, 귀에는 재즈, 눈앞에는 파리. 


지금까지는 황금 나선의 기제가 빙글빙글 돌며 열정과 무기력 사이를 왕복했었는데, 최근의 생소하고 특별한 경험들이 누적되다 보니 내게는 꽤나 낯선 영역에 도달한 것을 느낀다. 


나는 그 영역에 여유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그라나다는 너무 사랑스러운 도시다. 참 꼬질꼬질하다.

도착한 첫날 산 미구엘 전망대를 올랐다.



우리는 가끔 우연히 마주치는 완벽한 순간에 세상과의 영적인 연결성을 느낀다. 

하늘이 완벽한 분홍빛을 내며 하루가 시작될 때, 새들이 지저귐으로 합창하며 머리 위를 지나칠 때, 녹음이 푸르게 흔들릴 때...


신이 존재한다면, 스페인은 신의 축복을 받은 나라라고 생각했다. 

황금빛 태양이 도시의 구석구석을 물들였다. 사람도, 나무도, 넝쿨도, 길거리의 개들까지도 생명력으로 꿈틀댔다.


뽐내지도 않고, 겸손하지도 않다. 아주 솔직하다.


땀 흘리지 않고 손에 넣은 것들을 당연시하고, 어렵게 얻은 것들에 비대한 가치를 두던 시기가 있었다.

애쓰고 염원하는 상태가 익숙해서, 자연스럽게 내게 오는 것들을 나다운 것이 아닌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했다.

조금씩 알게 된다. 

내가 얻지 못할 것들은 애초에 내 길에 없다. 내게 귀속될 것은 어떻게든, 어디서든 운명된 때에 내게 온다. 


전망대 아래에는 꼬깔콘처럼 생긴 나무와 비슷하게 갈색 지붕을 한 집들, 그리고 알함브라 궁전과 그에 이어진 웅장한 알카사바가 한눈에 보였다.


햇빛의 힘을 빌려 가장 선명한 색채를 주체하지 못하고 뿜어내는 광경을 멍 때리며 바라봤다.

한국은 치열하고, 파리는 의욕이 없다. 

난 느긋하고 자연스러운 그라나다로 은퇴하기로 결심했다.


여유를 동경하거나 스스로 강요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단 내가 치열한 사람, 그러다가도 어쩔 때는 의욕이 없는 사람임을 자각하고 인정하게 됐을 뿐이다.


황금 나선을 따라 정신없이 빙글빙글 헤매다가, 점점 시작점으로부터 멀어지고 기복의 빈도를 줄여나가며 내가 가는 길과 나의 성향을 훨씬 객관적으로, 더욱 너그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난 이 사고가 여유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그라나다에서 반지를 샀다. 그라나다와 닮은 색의 보석이 가운데에 박혀있다.


황금 나선형은 얼핏 봤을 때는 아르키메데스 나선형보다 심하게 소용돌이치는 것 같지만, 그 가운데는 "고요한 눈(calm eye)"로 불리는 중심점이 존재한다. 그 중심은 가까이 갈 수는 있지만 절대로 도착할 수 없는 점근점이다.

고요한 눈은 불변의 무게중심이고 그것을 맴도는 황금 나선은 균형 잡힌 움직임이다. 


아르키메데스 나선형은 나아갈수록 곡률이 커지지만, 황금 나선형은 항상 곡률이 일정하다. 

그래서 황금 나선형으로 성장하는 동물의 뿔은, 데이지 꽃 머리는, 솔방울은, 그라나다에서 흔들리던 이파리들은 아무리 커져도 무게중심이 같기에 성장하며 새로운 무게중심을 찾을 필요가 없다.  


정답은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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