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국 구수한 냄새는 그리움의 근원이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 우리는 땀나는 줄도 모른 채 놀이에 정신 팔렸다. 그러다가도 밥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하나둘 흩어졌다. 집으로 달려가는 꼬맹이 코에 구수한 냄새가 들어왔다. 어른들은 빙 둘러앉아 막 뜯어온 상추나 찐 호박잎에 밥과 강된장을 얹어 입이 미어지게 넣었다. 또 약 오른 풋고추를 날된장에 푹 찍어 먹었다. 매캐한 모깃불과 함께 떠오르는 여름날 평화로운 기억이다.
한겨울엔 뜨끈한 아랫목엔 청국장과 메주 띄우느라 쿰쿰한 냄새가 진동했다. 화로에선 보글보글 찌개가 끓었다. 청국장에 굵은 멸치를 손으로 비벼 넣고, 방 한구석에서 키운 노란 움파만 들어갔는데 어른들은 맛있게 먹었다. 지금은 냄새로만 기억하는 특별한 청국장엔, 화로에 석쇠를 얹고 인절미를 구워 조청을 찍어주던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녹아있다.
어느 날 외할머니를 모시고 엄마 외가에서 하룻밤 잔 적이 있었다. 갓 시집온 외숙모가 아침상을 들여왔다. 어른들은 새댁인 며느리가 끓인 된장찌개가 맛있다고 칭찬했다. 우리 집에서 먹던 것과는 달리 좀 칼칼했고 맛이 진했다. 내 입엔 잘 맞지 않아 ‘어른들은 이게 정말 맛있나?’ 하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집마다 된장 맛이 다르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결혼 날짜를 잡고 시댁에서 처음으로 먹었던 밥상에 막장 찌개가 올랐다. 어머니는 갑자기 저녁 먹고 가라며 서둘러 찌개를 끓이고 밥을 해주셨다. 처음이라 나는 숟가락질하기도 좀 어려웠는데 그 찌개가 정말 맛있었다. 내가 맛있게 먹으니, 어머니는 내 그릇에 밥 한 숟가락을 더 얹어주시며 ‘넌 우리 식구다.’ 하고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내가 힘이 들거나 어려울 때 떠오르는 특별한 된장국이 있으니, 그건 늘 마가린과 함께다. 내가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곳은 공장과 기숙사가 함께 있는 직물공장 사무실이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공장에서 직접 무늬를 넣어 직물을 짜고 염색도 했다. 전문기술자부터 나이 어린 수습공까지 150여 명이 근무했다. 대구에서 큰 공장을 운영한다는 두 형님과 함께 사장님 삼 형제가 모두 직물공장을 운영했다. 섬유 수출로 돈을 많이 번 알짜배기라는 소문이 돌았다.
나도 회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사무실 직원은 밥값을 내지 않았지만, 기숙사에 사는 직원들은 월급에서 밥값을 조금씩 공제했다. 직원들 복지가 엉망이었던 그 시절, 밥은 깍두기나 배추김치에 다른 반찬 한 가지와 국이었다. 식당에선 커다란 가마솥을 몇 개 걸어 놓고 밥하고 국을 끓이는데 거의 매일 우거지나 시래기에 된장을 풀어 넣었다. 별다른 재료를 넣는 것도 아닌데 굵은 멸치만 들어간 국물에 우거지 넣고 끓인 국은 시원하고 구수했다. 어쩌다가 소고기가 들어간 뭇국과 미역국을 끓이는 날이면 식당 밥이 싫다고 바깥에서 사 먹던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금세 동나기도 했다.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이 식당에 올 때 뭔가를 가지고 오기에 보니 바로 마가린이었다. 그걸로 밥을 비비기도 했지만, 대부분 된장국에 한 숟가락 퍼 넣는 것이었다. 그네들이 부족한 기름기를 섭취하는 방법이었다. 식당 아주머니들은 나에게 참 잘해줬다. 어느 날은 가마솥에서 긁어낸 누룽지를 건네고, 괜찮다 사양해도 마가린을 한 숟갈 퍼서 내 그릇에 넣어주기도 했다. 나에게 주는 그분들 마음인 걸 알아 기름이 둥둥 뜨는 국을 말없이 먹었다.
복날 무렵이면 사장님은 직원들을 위해 특별한 복달임 상을 준비했다. 붕장어(아나고)회였다. 신선한 회를 위해 사장님 단골 조리사가 직접 와서 공장 마당에 천막을 치고 붕장어를 손질했다. 살아있는 붕장어를 못으로 고정하고 껍질을 벗긴 뒤 잘게 썰어주면, 보조하는 사람이 헝겊에 비틀 듯 짜 접시에 놓았다. 당시 비위가 무척 약했던 나는 우연히 그 광경을 보고, 눈처럼 소복하게 쌓인 붕장어회는 한 점도 먹지 못했다.
바닷가가 고향인 직원 몇몇은 환성을 지르며 좋아했지만, 나처럼 생선회를 먹지 못하는 아이들도 제법 있었다. 한참 먹을 것에 굶주려있던 아이들은 주저하면서도 권하는 대로 먹었고, 다음 날이면 배탈로 인해 화장실에 길게 줄이 늘어서곤 했다. 매일 된장국만 먹던 아이들이니 배가 놀랐는지도 모른다. 비싼 재료에 조리사까지 직접 왔으니, 비용은 꽤 들었을 것이다. 나름 사장님의 배려였건만, 정말로 배고픈 직원들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으니 효과적인 회식은 아니었다.
내가 다른 직장으로 옮기고 나서도, 복날이면 천막 아래 눈처럼 소복하게 쌓인 붕장어회가 차려진 상이 떠오르곤 했다. 수출 날짜를 맞추려고 야근도 하면서 된장국에 마가린을 넣어 먹던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도 함께다. 전국 각지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입사했던 어린 수습공들은 명절이면 선물을 사 들고 고향으로 갔다. 다시 오기도 했지만, 다른 공장으로 가거나, 예쁘장한 아이들은 유흥업소로 가기도 했다.
그 애들도 나처럼 아들딸 낳고 나이 들어갈 것이다. 모든 게 풍족해진 지금, 그때 그 시절을 어떻게 떠올릴까. 형편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도 하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왔던 아이들. 공장에서 고된 작업 하며 된장국에 마가린을 넣어 먹었던 일을 요즘 아이들에겐 말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저녁엔 배추된장국을 끓여 마가린 한 숟가락 넣고 먹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