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나, 그러나 달라진 시선
<무감각>
멀쩡한데, 이상하게 아무렇지 않았다
병명을 들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뼛속까지 스며들지 못한 채, 공기 중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이 뭔가 더 설명하셨지만, 그날의 목소리는 배경음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저 “아, 그래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큰 말을 너무 담담히 들었던 내 반응이 이상하기도 하다.
몸도 멀쩡했고, 숨이 차는 것도 없었으니까.
내가 병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이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낯설었다.
<불안>
가까운 사람들의 말이 나를 삼켜버렸다
“그 병이면 10년밖에 못 사는 거 아냐?”
“완치가 안 된대.”
“폐이식받아야 하는 병 이래...”
누군가는 걱정으로, 누군가는 무지로 내게 말을 건넸다.
그 말들은 바늘처럼 꽂혀, 내 마음에 구멍을 냈다.
불안은 그렇게 찾아왔다.
내가 만들어온 미래들이,
건강하다는 전제로 계획했던 삶의 조각들이
하루아침에 허공에 흩어지는 것 같았다.
‘숨이 멀쩡하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나는 여전히 나인데,
사람들이 ‘병에 걸린 나’를 먼저 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이 두려웠고, 낯설었다.
<분노>
왜 나야? 왜 지금이야?
불안이 깊어질수록, 분노도 자라났다.
왜 하필 나야. 왜 지금이어야 했을까.
나는 꽤 성실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운동도 했고, 식단도 조절했고, 정기적으로 건강검진도 받았다.
스스로에게 꽤 신경 쓰며 살아온 편이었다.
그런데 이 병은 조용히, 아주 오랫동안 자라고 있었단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니,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이미 내 안에 있었는지도.
공평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멀쩡해 보였고,
나는 그들보다 더 조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이유라도 있었으면, 납득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력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희귀 질환이라는 말은,
치료법이 뚜렷하지 않다는 말은,
사람을 참 무력하게 만든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정해진 치료 루트도 없고,
완치를 향한 약도 없고,
단지 기다리는 것뿐.
시간은 흐르는데,
나는 가만히 있어야만 했다.
그게 가장 지치고 슬픈 일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도,
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것도 너무 벅찼다.
<이해>
병은 내가 아니다. 내 일부일 뿐이다
어느 순간, 나는 조금씩 이 병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LAM이라는 이름 아래에 숨어 있던 단어들을 하나씩 꺼내 보았다.
낭종이 무엇인지, TSC 유전자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건지.
왜 폐에 작은 구멍들이 생기고,
왜 숨이 차는지.
그리고 알게 됐다.
나처럼 이 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10년, 20년을 함께 견디며 살아온 이들도 있었다.
일상을 유지하고, 운동을 하고,
자신만의 속도로 병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걸 보며 나도 조금씩, 내 호흡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수용>
나는 살아가고 있다. 살아내고 있다
어떤 날은 여전히 무섭다.
어떤 날은 숨이 다소 불편하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고,
살아가고 있고,
살아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전보다 지금의 내가 조금 더 단단하고 다정하다는 걸 안다.
병이 없었더라면 몰랐을 나 자신을
이제는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병은 내가 아니다.
그저 나의 일부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