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잣말은 나의 언어다 5
고독과 친밀감 사이에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나는 자주 나에게 말을 건다.
“오늘은 덜 아프네.”
“이 정도면 잘 견딘 거야.”
“이건 조금 억울했지.”
“그래도 뭐, 괜찮아.”
거울을 보며 이를 닦을 때도,
혼자 밥을 차릴 때도,
밤중에 갑자기 눈이 떠졌을 때도,
나는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건다.
이것이 외로움의 증거일까,
아니면 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연대일까.
혼잣말은 내 안에 숨은 언어다.
누구에게도 번역되지 않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문장들.
조금 어눌하고, 다소 산만하고, 때론 엉뚱한 말투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진짜 내가 살아 있다.
수술을 받고 나서 집에서 요양하는 이 시간,
나는 세상과 거리를 두는 대신
내 안으로 깊숙이 내려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밖으로 흘려보낼 말이 줄어든 만큼,
내 안에서부터 솟구치는 말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말들을
혼잣말이라는 형식으로 기록한다.
병실에서의 아침,
나는 혼잣말로 하루를 시작했다.
“이제 하루가 시작되네.”
“그럭저럭 잘 버티자.”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그러고 커튼을 젖히자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
맞은편 병상의 78세 여성 환자분은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 위에 간이밥상을 펼쳐두고
책을 읽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며 밤새 잠이 오질 않아 책을 보았다고 했다.
이질적이기보다는 기이하게 아름다웠다.
그 연세에, 병실에서조차 책을 놓지 않는 모습.
나는 저도 모르게 또 한 번 중얼거렸다.
“와... 대단하시다.”
그분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책은 내가 놓을 수 없는 손이야.
여자로 태어나서 제대로 배우진 못했지만
그래서 더 책으로 배웠지.”
그분은 딸만 넷을 두셨단다.
모두 이화여대를 졸업시켰다고 했다.
“내가 못 배운 한이 컸어요.
그러니 딸들만큼은, 세상에 꿀리지 않게 키우고 싶었죠.”
책을 통해 위로를 받았고,
책을 통해 세상을 배웠고,
그 배움을 딸들에게 쏟아부었다고.
지금은 딸 넷이 매달 50만 원씩
총 200만 원을 모아 보내준다고 했다.
그 말도, 책장을 넘기듯 담담히 전하셨다.
나는 그날 이후, 혼잣말의 어조가 달라졌다.
“나는 지금 어떤 방식으로 배움을 이어가고 있을까?”
“내 삶에도 유연하게 흐르는 문장이 있을까?”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그분의 이야기는 내 속에 스며들었다.
내 혼잣말은 조금 더 깊어졌고,
조금 더 천천히, 조용히 나를 향했다.
혼잣말은 때로 기도의 형식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책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의 방식이 되기도 한다.
말을 주고받는 사람은 없지만,
나는 말로써 존재하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친밀하게 나 자신과.
고독이 꼭 외로운 건 아니다.
오히려 그 고독 속에서,
나는 가장 친밀한 대상을 만난다.
바로 나 자신이다.
사람들과의 대화는 때로 예의가 필요하지만
혼잣말에는 그런 게 없다.
논리 없어도 되고,
말꼬리가 흐려도 된다.
무례할 수 있는 자유,
무방비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내 혼잣말의 품성이다.
그날의 병실,
책과 밥과 배움이 나란히 놓였던 그 장면은
지금까지도 내 안에서 반짝인다.
혼잣말은 그렇게 누군가의 이야기에서 시작되기도 하고,
내 기억 속에서 자라나기도 한다.
삶을 묵묵히 살아낸 사람의 침묵 속엔
말보다 더 크고 단단한 문장이 있다.
그 문장들은 혼잣말처럼 내 속에서 피어난다.
나는 여전히
조용한 오후, 혼잣말을 한다.
거울 앞에서도, 밥상 앞에서도,
그리고 침묵의 페이지를 넘기는 마음속에서도.
“괜찮아, 오늘도 나랑 같이 있었으니까.”
혼잣말은 나의 언어다.
지금, 이 고요한 삶의 가장 정직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