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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뺨따귀.

(내면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_2)

by 위시러브


살면서 두 번의 뺨따귀를 맞았다.

9살에 한 번, 고등학교 졸업 전에 한 번.

두 번 모두 아버지에게 맞았다.


술만 마시면 180도 달라지는 사람이 있다. 바로, 아빠가 그랬다. 평소에는 말수가 적어서 우리와도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는다. 무뚝뚝하고 소심하지만 온순한 사람이다. 그러나 술이 들어가면 사람이 완전히 바뀐다. 말이 많아지고 눈빛이 강해지며 목소리가 커지고 쉽게 화를 내며 행동이 거칠어진다. 후회할 행동을 많이 한다. 가끔은 우리와 놀아주거나 맛있는 음식도 사주며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기도 하지만, 가족을 괴롭히는 날이 훨씬 더 많다. 그중 하나가 우리를 앞에 앉혀놓고 설교를 늘어놓는 일이다.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 또 반복하며. 밤늦은 시간에 졸리고 피곤한 몸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까지 반복해서 들으며 앉아 있기란 매우 괴롭다. 어린 나이에는 그것이 얼마나 곤혹스럽겠는가. 나의 어린 시절에는 그런 밤들이 많다. 곤혹스러운 밤. 원래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9살의 어느 새벽, 창밖으로 새벽빛이 걷히며 날이 밝아오는 게 보였다. 밖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집에 와서 또 술을 마시던 아빠가 우리를 깨운다. 술상 앞에 앉혀놓고 또 설교를 늘어놓더니 질문을 하나 던진다. 설거지를 할 때 밥그릇을 물에 담가뒀다 시간이 지나서 해야 되느냐, 바로 해야 되느냐. 어린 나이였지만 험악한 얼굴과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더욱 긴장이 되었다. 고민하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씻어야 돼요." 아빠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난데없이 큰 손바닥으로 내 볼을 세게 내리쳤다. 그것도 모르냐고 소리치면서. 볼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눈물이 차오르지만 꾹 참아본다. 그때 내 기분은 자다가 벼락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왜 맞아야 하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게 그렇게 잘못인가? 그 새벽에, 자다 깬 아이들에게 할 질문인가? 사실 그 질문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어른인 지금 생각해 봐도 정답이 있다기보다는 설거지하는 사람 마음 아닌가? 바로 설거지를 하더라도 뜨거운 물에 담가둔 채로 하나씩 충분히 닦아낼 수 있다. 우리가 왜 이런 일로 혼나야 하지? 그때 나는 겨우 9살이었다. 내 동생은 7살이었고. 그 정도로 술이 무서운 거다. 평소엔 나를 때리는 일이 없었다. 그날이 아빠에게 처음으로 맞은 날이다. 말썽꾸러기였던 내 동생은 많이 혼났지만, 얌전했던 나는 혼나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아홉 살짜리가 그 새벽에 태어나 처음으로 뺨따귀를 맞은 것이다. 얼마나 당황스럽고 억울했겠는가. 엄마가 아빠를 제지시킨 후 내게 얼음찜질 같은 걸 해주었다.


분명히 밖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우리 가족을 괴롭혔으니까. 어떻게든 계속해서 트집을 잡아 엄마와 싸우거나 살림살이를 부순다. 왜 우리가 화풀이 대상이 되어야 하지? 이 의문은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또 한 번은 고등학교 졸업식 이전의 어느 날이다.

친구들과 놀다가 흥이 잔뜩 오른 나는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졸랐다. 부모님께 허락받은 친구 세 명을 데리고 저녁 늦은 시각에 집으로 왔다. 집으로 들어선 순간, 직감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는 걸. 아빠가 또 만취해서 와 있던 것이다. 아차 싶었다.


인사만 하고 얼른 내방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러나 결국 아빠가 우리를 불러냈다. 내 친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공손한 자세로 앉아서 아빠의 설교를 들어야 했다. 설교가 길어질 때면 어김없이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는데, 그날도 또 그런 조짐이 보이자 초조해진 나는 그만하라며 친구들을 데리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 아빠가 나를 불러내서 나갔더니, 냅다 뺨따귀를 날린다. "싸가지 없는 년."이라며. 것도 내 방문 바로 앞에서 말이다. 문은 닫혀 있어도 소리가 들렸을 텐데. 나는 속으로 그 걱정이 먼저 들었다. 아픈 거나 창피한 건 뒷전이고 그저 친구들이 걱정됐다. 괜히 내가 우리 집으로 데려와서는 이런 일을 겪게 한 게 미안했다. 방으로 들어간 나는 애써 괜찮은 척했고, 친구들도 모른 체해주었다.


어릴 때부터 친구였던 몇 명을 제외하고는 우리 아빠에 대해서 잘 모르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그날 데려온 친구 세 명 중 두 명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많이 놀라고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괜찮다고 해주어서 고마웠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그나마 몇 명에게 대략적으로라도 내 가정사를 털어놓은 경험이 있지만, 그래봤자 극소수다. 원체 어디 가서 아빠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혹시나 나를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를 만큼 방대하고 고통이 커서이기도 하다. 나는 그저 친구들과 많이 웃고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 순간을 즐기는 게 좋았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내 가정사를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대학 때 한 번은 친한 오빠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빠를 미워한다고. 그 말을 들은 오빠는 이렇게 말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를 낳아주신 분인데, 아빠인데, 미워하면 어떡하냐고 한다. 물론 그 말도 맞다. 게다가 내 속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직접 겪어보지 않는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당연하다. 그걸 알기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용기도 없었고.


지금은 말할 용기가 생겼다.

이런 용기는 죽을 때까지 생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어떤 믿음이 생긴 덕분이랄까. 대부분은 남의 불행을 보고 함부로 그 사람을 깎아내리지 않을 거라는.


우선, 지금까지 내 속이야기를 들은 사람이라면 단 한 명도 나를 어떤 편견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은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었다. 오히려 평소에 밝고 잘 웃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며,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어쩜 티를 하나도 안 낼 수가 있냐며 대단하다고 말해준 사람들도 있다. 도리어 나를 어려운 역경을 이겨낸 사람으로 봐주기도 했다. 그리고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배려도 보여주었다. 그저 '온전한 나'를 봐준 고마운 사람들. 그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다.


20대 중후반에는 내게도 가정이 생기면서 가족에게서 받는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갔다.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그들과 함께 하며 내 인생을 사랑과 행복으로 채워가고 있다. 그것 또한 치유가 아닐까. 사랑은 내 삶을 희망으로 빛나게 해 준다.


그리고 독서와 글쓰기가 큰 용기를 심어주었다. 독서와 글쓰기는 진정한 나를 만나게 해 준다. 나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게 하고, 나를 조금씩 성장시켜 준다. 내가 만난 고난과 시련을 이해하는 힘과 삶의 지혜를 기르게 해 준다. 그래서 이렇게 아픈 기억들을 꺼내어 보고 대면하며 치유하는 과정에도 도전할 수 있었다. 내면을 가꾸는 일은 오랜 시간 노력해야 한다. 당장의 드라마틱한 치유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지만 꾸준히 내면아이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언젠가는 진정한 내면의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사실 아빠는, 나보다 더 내면아이 치유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다. 가슴에 상처와 슬픔이 가득 차 있을 것으로 안다. 그래서 과거의 상처들과 대면하는 과정을 거친 후에는 아빠가 왜 알코올중독자로 살아가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해하는 여정을 떠나보려 한다. 그 과정에서도 분명 어느 정도의 치유가 가능할 테니까.


이번에 만난 내면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때 많이 당황스러웠지? 너의 잘못이 아닌데. 마음껏 따져보지도 못하고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얼마나 수치심을 느꼈을지, 얼마나 아팠을지 잘 알아. 당장은 어린 네가 이 상황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그리고 살면서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를 때마다 분노에 몸부림치겠지만, 너는 결국 잘 이겨낼 거야. 그 모든 고통의 시간들을 이겨내고 행복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게 될 거야. 넌 언제나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란 걸 꼭 기억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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