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5 / 덕경편 38장(5/6)
간밤에 곰곰 생각해 보니 어제 제가 가졌던 의문,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생기고'가 풀렸습니다. '도'는 타고난 본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 타고난 본성대로 행하는 것에는 '덕'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뜻인 거죠. 즉, 자연은 덕이 있지만 덕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처럼.
일례로 꽃이 피는 것은 본성인 거지 '내가 꽃으로 피어났구나. 참 장한 일이야.'란 의식이 없다는 거죠.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내가 지금 덕을 행하고 있다, 선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미 도를 잃은 거죠. 의식해서 하는 것은 '인'이니까요. 인은 같은 결과라도 노력해서 얻어지는 거죠. 선행, 악행 구분하는 자체와 애써 행한다는 점에서 이미 본성은 아닌 거죠.
이렇게 말해 볼까요? '피할 수 없으면 억지로라도 하라'는 말이 인이라면,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덕이라고.
저는 매달 아프리카 기아들과 국경없는 의사회에 돈을 보냅니다. 내가 그래도 사람답게 산다는 뿌듯한 마음이 든다면 저는 이미 도를 잃은 거지요. 왜냐하면 그건 당연한 일이지 자긍심 느낄 일이 아니라는 거죠. 궁극적으로 나와 남이 하나니까요. 나는 배부르게 먹고, 아프면 병원을 갈 수 있으니 남도 그렇게 대접받아야 하니까요. 그러니 '돕는다'는 의식조차 없어야 하는 거죠. '베푼다'는 말도 안 맞아요. '기부'라는 말도 거창하죠. 결국 내가 나한테 하는 건데 뭘 그렇게 생색인가요.
도는 내 안의 신성입니다. 저절로 갖춰져 있다는 뜻입니다. 덕, 인, 의, 예 등 외부에서 주어진 인위적인 장치로 삶을 무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예는 겉치레일 뿐입니다. 바리새파의 치떨리는 형식적 행위입니다. 피터지는 당파 싸움과 정쟁도 결국 누가 예에 더 합당한가를 따지자는 일이듯이.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예의만 차렸다'거나 '예의 상'이란 말을 자주 쓰죠. 거기에는 진심이 빠져 있지요. 마음이 없죠. 그래서 예를 속마음의 껍데기라고 한 거죠. 예의없는, 무례한 사람을 보면 대뜸 욕설이 나가는 것도 그래서예요. 팔을 걷어붙이죠. 그 사람 속사정 따위 헤아려 보고 싶지도 않고, 헤아릴 필요도 없죠. 엊그제 말한 제 친구가 정말로 돈이 없어서 저한테 밥 한 그릇 못 샀는지 내 알 바 아닌 거죠.
예란 속마음의 껍데기요
어지러움의 우두머리다
예를 들먹일수록 옳고 그름의 시비가 일어납니다. 예가 관계의 척도가 되면 서로 조금치의 양보도, 눈곱만큼도 손해보려고 하지 않죠. 예의 저울은 정확히 수평을 유지해야 하며 눈금이 기우는 순간 예의 이름으로 단죄합니다. 세상이 연일 시끄러울 수밖에요.
요즘 세상에는 서로 예의만 잘 지켜도 이렇게까지 혼란스럽지는 않겠지요.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뭔가요? 예의가 무너진 자리에는 법이 들어섭니다. 벌을 주는 거지요. 자발성과는 점점 멀어집니다.
이미 갖고 있는 인식은
꾸며진 도이며 어리석음의 단초다
예는 철저히 인간이 만든 겁니다. 가공된 보석처럼 정교하고 교묘하고 매끈합니다. 예법을 아는 일에 둘째가면 서러운 사람, 그런 잘난 척이 바로 도를 꾸미는 일이며 인간관계의 자발성과 인간성의 생명을 죽이는 단초라는 겁니다.
덕은 가공하지 않은 원석입니다. 덕성이 높은 사람일수록 어눌하고 촌스럽게 보이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투박하게 보여도, 세련되지 못해도 그 안에 영롱한 빛이 존재합니다. 자체 발광합니다. 웅숭깊고 음전합니다. 부박하지 않고 중후합니다.
38장, 내일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제 38 장
높은 덕의 사람은
자기의 덕을 의식하지 않기에
정말로 덕이 있는 사람이다.
낮은 덕의 사람은
덕을 잃으려 하지 않기에
실상은 덕이 없는 사람이다.
덕이 높은 사람은
한다는 의식이 없이 하기 때문에
별로 할 일이 없다.
덕이 낮은 사람은
의도적으로 하기 때문에
해야할 일이 많다.
훌륭한 인(仁)의 사람은 일을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의(義)의 사람은 일을 하면서
무엇을 위한다는 이유가 많다.
높은 예(禮)의 사람은 일을 하되
따라오지 않으면
팔을 걷어붙이고 억지로 당긴다.
그러므로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생기고
덕을 잃은 뒤에 인이 생기며
인을 잃은 뒤에 의가 생기고
의를 잃은 뒤에 예가 생긴다.
예란 속마음의 껍데기요
어지러움의 우두머리다.
이미 갖고 있는 인식은
꾸며진 도이며 어리석음의 단초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람은 중후함에 머무르지
얄팍한 데 거하지 않는다.
열매를 택하지
꽃을 주목하지 않는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