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10 / 덕경편 40장(2/3)
깜빡이는 커서는 어서 글자를 먹여 달라고 재촉하지만 저는 그저 망연히 앉아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내게 무슨 의미이며 여러분께는 또 무슨 번거로움인지, 나하나 추스르자고 시작한 일에 영혼 시린 사람들이 어깨를 잇대지만 저는 여전히 무기력을 두르고 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 무력이 때로는 선한 작용을 하는가 봅니다.
"정말 좋은 글은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구나. 감추고 싶은 나의 어두움이 부끄러운 게 아니구나' 하면서 자신을 긍정하게 만드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선생님의 글은 저에게 많은 위로가 되고 저 자신을 긍정하게 하는 힘이 된답니다."
며칠 전 이런 댓글을 받았습니다. 오늘 노자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유약함이 도의 작용이다.
제게 가장 약함은 가장 강함이었던가 봅니다. 글을 쓰는 것외에는 무너져 내리는 삶을 지탱할 길이 없었던 것인데 그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방편이 누군가의 나무 그늘이 되고 처마가 되어 가고 있었던가 봅니다.
"눈물이 날 만큼 제 마음을 대신 표현해 주셨네요. 이래서 작가가 필요한 거죠. 내 속을 읽어주는 사람이 작가죠. 작가는 넓게 봅니다. 내 시선으로만 세상을 보지 않습니다."
8월 26일, 스위스를 경유하여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신 분이 살아계실 때 주신 편지입니다. 제가 오늘 '진도를 빼지' 못하는 연유가 실은 여기에 있습니다. 가녀린 촛불처럼 그 간의 의연함이 흔들리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와도 같은 고뇌와 인간적 번민 앞에 서곤 했던 그분을 생각하며 저는 망연자실할 뿐입니다. 그래서 글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제게 눈물의 서신을 쓰시곤 하던 시간에 저는 꿈을 꾸었지 싶습니다. 말라빠진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고이 감싸는 꿈을. 그 가녀리게 돌출된 뼈의 감촉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작은 나무 상자에 보금자리를 만들고 이불 삼아 티슈를 덮어주었습니다. 워낙 말라서 깃털처럼 가벼운 티슈 한 장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애처로움으로. 굳이 살려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왜 두 마리였을까요.
생사를 관장하는 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애써 살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두 마리가 상징하는 것은 떠나는 영혼과 바래다 주는 영혼이 아니었을까요?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하는 말은 모두 선하다'는 공자 말씀처럼 제게 하셨던 그분의 마지막 말씀들은 제 영혼에 새기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립니다.
"그 재능을 헌신하세요. 나를 위해 글을 쓰지 마세요. 세상을 위해 쓰세요. 하루 세끼 목에 풀칠 못하겠습니까. 당당하게 사세요. 작가의 기개와 자존심으로 사세요."
정수를 쪼개는 듯한, 소명을 일깨우는 저를 향한 그분의 유언에 앞서 댓글을 주신 독자의 말이 오버랩됩니다.
"문장 하나하나에서 선생님의 삶으로부터 우러나온 진정성을 직감적으로 느낍니다. 문외한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아픈 사람이 많은 이 시대를 위로해 주시길."
도의 피조물, 하나님의 자녀인 제 영혼에도 도와 진리의 로고스가 면면히 흐를 것입니다.
저의 한 없는 유약함이 그 증거입니다. 그러나 유약함이 곧 강함입니다. 낯 모르는 타인들을 위로하고, 지상에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영혼을 저 세상 입구까지 배웅하게 하니까요.
여러분은 어떤 유약함으로 강함을 사십니까?
내일 40장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제 40 장
반대편을 향하는 것이 도의 운동 방식이고
유약함이 도의 작용이다.
만물은 유에서 살고
유는 무에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