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는 빽

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11 / 덕경편 40장(3/3)

by 신아연


40장 마지막 구절은 유생어무(有生於無)입니다. 흔히 '유는 무에서 왔다' 로 푸는 구절이지요. 뭔가 있어보이는, 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이런 애매하고 모호한 말들이 도덕경은 다가가기 어렵다는 선입견을 주지요. 듣기만 해도 골치가 아파요. 신선노름하는 도사급에서 하는 말이지 나하고는 무관하다고 치부해 버리죠.


그런데 보세요. 지금까지 도덕경 내용 중에서 삶에 적용 못할 구절이 하나라도 있었나요? 다음 41장에 나옵니다만, 도덕경을 읽으면 돈이 생기냐, 떡이 생기냐 하는 사람이 최하수입니다. 실제로 돈도 생기고 떡도 생깁니다. 제가 그 증인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모호하지요? 그 이유는 번역을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유가 무에서 '나온' 게 아니라, 유는 무로 인해 '산다'로 이해해야 합니다. 생(生)을 '낳다'로 푸니까 길을 잃는 겁니다. 바로 앞의 '천하만물생어유'도 '천하만물이 유에서 나왔다'로 풀면 안됩니다. 천하만물이 유에서 나온 게 아니라 천하만물이 바로 유의 범주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 눈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바로 '유(有)'인데 만물이 유에서 나왔다는 게 말이 안 되죠. 유는 그냥 유예요. 존재하고 인식되는 모든 것.


자, 이제부터 중요합니다. 그 유가 전부가 아니라는 거지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죠.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는 거죠. 유가 유다우려면, 유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배후의 무(無)를 의지해야 합니다. 또 말이 복잡해 지는 거 같죠?


현상계와 구분되는 실재계가 있다는 둥 하는 서양의 이원론을 떠올리시면 안 되요. 노자의 유무 인식은 눈에 보이는 세계는 가짜고, 진짜 세계는 따로 있다는 논리가 아니에요. 유는 무라는 든든한 뒷배에 의지해 있다로 이해하셔야 해요. 부모 빽 있는 집 애들처럼. 이때 '무'는 있다, 없다 할 때의 무가 아니라,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만물을 살게 해주는, 도와 같은 의미인 거죠. 부모 빽 없는 흙수저도 '도의 빽'을 의지하면 잘 살 수 있어요. 흙수저는 고사하고 무수저라고 해도 살아갈 수 있어요. 저도 그렇게 살아요.


성경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말이 있죠. 떡이 '유'고, 하나님 말씀이 '무'인거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15;5) '가지'가 유고, '나무'는 무죠. 나무를 떠난 가지는 뽐내 봤자 곧 말라 죽죠. 가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죠.


설교해서 미안합니다. 새벽에 성경을 읽다가 40장과 이렇게 매칭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살다보면 마음에 온갖 변덕이 일어나지요.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마음의 출렁임이 멈추질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그 모든 요동침은 결국 바다 내에서의 일이지요. 파도가 단독으로 어디 따로 가서 무슨 짓거리를 할 수 있나요? 파도가 아무리 요란을 떨어봤자 바다 표면의 일일 뿐, 바다 자체는 언제나 고요하고 잠잠합니다.


파도와 같이 우리의 에고는 매순간 생각과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댑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래 마음, 진아(眞我) 는 깊은 바다와도 같습니다. 에고가 유라면 진아는 무입니다. 진아를 다른 말로 무아(無我)라고 하듯이. 불교에서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말은 도교의 유와 무의 관계를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나라고 할 것이 없음(무) 안에서 나라고 하는 존재(유)가 편안히 살아갑니다.


다음 주, 41장으로 다시 만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제 40 장


반대편을 향하는 것이 도의 운동 방식이고

유약함이 도의 작용이다.

만물은 유에서 살고

유는 무에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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