얻는 것이 잃는 것, 잃는 것이 얻는 것

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18 / 덕경편 42장(2/3)

by 신아연


어제, 도덕경에서 가장 어렵다는 부분을 잘 넘겼습니다. 우리 앞에 매순간 일이 펼쳐지지요. 저는 언젠가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갖게 되었습니다. 좋아도 아주 잠깐, 싫어도 그저 깜박, 맥박이 희미하게 뛰듯이 둘 사이에 거의 차이가 없도록 내면 훈련을 지속합니다. 넓고 긴 안목으로 보면 지금 눈 앞의 일이, 당장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을 것 같아도, 거꾸로 당장 죽을 맛이라도 어디서 어떤 열매를 맺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빛과 동시에 존재하는 그림자의 측면, 나아가 빛과 그림자의 자리 바꿈을 아는 사람은 생각과 행동이 조심스럽습니다.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처신하지 않습니다.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즉각 반응하기 보다 전체적인 상황을 보려고 합니다. 노자도 일찍이 그랬지요? 도의 사람은 살얼음 낀 시내를 건너는 듯 한다고. 양면을 살필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에 대한 비유인 거죠.


결국 균형 맞추기입니다. 나 자신의 내면세계와, 나와 너와, 나와 세상의 균형, 조화가 우리를 의연하고 초연하게 합니다. 궁극적으로 성장하게 합니다.


다음 구절 보겠습니다. 39장에도 나왔던 말이죠. 왕은 고과불곡, 즉 고아(고孤) 같고, 짝 없는 사람(과寡) 같고, 쭉정이(불곡 不穀)같은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낮춰 부른다고. 왕이 자신을 '과인'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 귀에 익숙하지요. 왜 그런다고요? 네, 균형을 맞추려고요.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고아 같은 사람,

짝을 잃은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왕은 오히려

이것들을 자신의 호칭으로 삼는다.


왕은 세상에서 제일 높죠. 그러니 세상에서 제일 낮은 것으로 '반대편끼리의 하나'라는 새끼줄을 꼬는 거죠. 왕이 그 정도로 겸손해야 안정감 있게 통치할 수 있으니까요. 하이힐처럼 한쪽으로 잔뜩 쏠려있는 높이로는 제대로 걸을 수가 없고, 까치발로는 오래 서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그런데 고아, 과부나 홀아비, 돈 없는 사람을 노자시대에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 여겼나 본데, 지금도 별반 다를 게 없을 뿐더러 저는 전부 해당하네요.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저를 좀 높여 불러야겠습니다. ㅎㅎ 자존감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처지가 낮을수록 높은 자존감을 가져야 하는 거죠.



그 다음 구절이 의미심장합니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이치는

덜어내려 해도 오히려 더해지는 경우가 있고

더하려 해도 오히려 덜어지는 경우가 있다.


끝나지 않는 파티는 없다는 말이 있지요. 어떤 일도 영원히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수는 없어요. 행운이 극에 달하면 불운이 오게 마련이고, 불운의 끝에서 행운을 만납니다. 쾌락의 정점은 불쾌죠. 배가 너무 부르면 불쾌해지잖아요. 앞서 언급한 균형 맞추기의 원리가 작동하는 거죠. 그러니 덜어내려 해도 채워지고, 채우려고 해도 저절로 덜어지는 게 세상 이치인 거죠.


얻는 것이 잃는 것이고, 잃는 것이 얻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가령 돈, 명예, 권력을 악착같이 쫓는다면 필경 건강을 잃거나 인간 관계가 어그러지겠지요. 반대로, 잃은 것은 물질과 지위지만 얻은 것은 시간과 마음의 여유일 수도 있지요. 저는 남편을 잃었지만 제 자신을 찾았고, 가정이 해체되고 나서야 그 소중한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저를 살펴보니 얻었지만 잃은 것은 거의 없네요. 잃고나서 얻은 것이 더 많네요.


여러분은 지금 어떤 처지에 계신지요? 주제넘지만 이런 말씀을 드려봅니다. 설령 물에 빠졌어도 버둥대지 말자고. 힘을 빼고 잠잠히 다시 떠오르기를 기다리자고. 죽을 것 같은 건 나의 '생각이자 의식'이지, 실제 죽지는 않는다고. 지금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지 않냐고.


내일은 노선생께서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치면 제 명에 못 죽는다고 악담을 하실 예정입니다. ^^


내일 함께 보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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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열



제 42 장


도는 하나를 살고

하나는 둘로 이루며

둘은 삼으로 존재한다.

만물은 음을 등에 지고 양을 가슴에 품고

두 기가 서로 조화를 이룬 형태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고아 같은 사람,

짝을 잃은 사람,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왕은 오히려

이것들을 자신의 호칭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세상 이치는

덜어내려 해도 오히려 더해지는 경우가 있고

더하려 해도 오히려 덜어지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나도 가르치는데,

억세고 강한 자는 제 명에 죽지 못한다.

나는 이런 이치를 가르침의 근본으로 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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