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20 / 덕경편 43장(1/3)
자연은 결실의 계절로 익어갑니다. 우리의 도덕경도 결실을 향해 갑니다. 아리까리 개념적인 말은 이제 없습니다. 실천할 일만 남았습니다. 이해 못해서, 몰라서 못했다는 말, 안 통한다 이거죠. 더구나 오늘 43장은 듣기엔 그지없이 쉽습니다. 그러나 실천하기엔 사람에 따라 전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도덕경에서 도경(1~37장)은 삶의 지침에 해당하고, 덕경(38~81장)은 그 지침을 따라 행함을 요하는 목록이라고 했지요? 오늘 살필 장은 전형적인 실천 장입니다.
제 43 장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리고
형체가 없는 것이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간다.
나는 이런 이치를 보며
무위가 얼마나 유익함을 안다.
말 없는 가르침과
무위의 유익함,
세상에서 이를 따를 만한 것이 없다.
어떤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분, 손 들어 보세요. 우리 독자 중에는 한 분도 안 계시겠지만 노파심에 그래도 풀이해 볼게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도 형체가 없는 것은 무엇일까요? 연약하고 유약해서 있는 둥 없는 둥, 하는 둥 마는 둥 그 존재감이 희미하지만 강하고 억센 것을 누그러뜨리고, 무너뜨리고 궁극에는 부리기까지 하는 것 그게 뭘까요? 네, 바로 도입니다. 사람으로 치면 노자 본인, 붓다, 예수 같은 존재인 거죠.
일상 중에는 물이나 공기가 이에 해당하죠. 물이나 공기는 다다르지 못하는 곳이 없지요. 노자는 특히 도를 물에 비유하기를 즐겨하지요. 물은 낮고 더러운 곳으로 흐르며 채우고 씻어 주잖아요. 구불구불 흐르되 막히면 돌아가고, 장애물조차 은근히 감싸며 제 갈 길을 갑니다. 모든 것을 먹이고 자라게 하지만, 방울방울 끊임없이 떨어지면서 바위를 뚫고 쇠붙이도 삭게 합니다.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단단한 것을 이기고 부리는 이치지요.
또한 물은 어떤가요? 스스로 형태, 형체가 없기 때문에 어떤 작은 틈으로도 스며들지요. 스며들어 함께 어울리면서 그 대상을 변화시키거나 변모시킵니다. 일정한 모양이 있다면 그 모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을텐데 물은 어떤 형태로든 흡수되고 흡수시켜 버리죠. 도가 그렇다는 거지요. 도는 세상에서 가장 능력이 있지만 그 능력을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사용한다고 노자가 말씀하십니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도 물처럼, 아니 도처럼 살아야 할텐데요, 적어도 도덕경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이게 정말 쉽지 않지요.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니까요, 사람에 따라서는.
도가 닿을 수 없는 사람은 없고, 도의 방식으로 감화 감동시키지 못할 사람이 없지만 우리가 과연 사회 현상을 대할 때나 인간관계에서 도로 접근을 하느냐는 건데요. 즉, 물처럼 할 수 있냐는 거죠. 애들 키울 때 생각해 보면 당장 보이죠. 과연 자녀들을 물의 방식으로 대했냐 이거죠. 직장 상사, 동료, 부하와의 관계를 물처럼 맺을 수 있냐는 거죠. 어려운 문제입니다.
특히 자기 신념,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 정체성이 확실한 사람,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닌 건 아닌 겨를 외치는 사람일수록 물처럼 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사람은 일정한 형체, 형태를 가졌으니까요. 그래서 틈이 없는 곳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이런 부류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소통할 수 있지요. 마치 한 자물통에 맞는 열쇠는 하나밖에 없듯이.
자기 생각만 옳으니 다른 삶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거죠.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거니까요. '라떼는 말이야~'가 이래서 나오죠. 꼰대 소리도 그래서 듣고요.
공산주의자는 자본주의자를 용납할 수 없고, 자본주의자는 공산주의자를 포용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 배척은 이데올로기보다 더 견고하지요. 체제와 신념이 강할수록 개인도 사회도 경직되고 모나게 되어 자꾸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내편네편 가르며 폭력적이 되어 갑니다.
도덕경을 공부하면서 물의 성정을 배우려고 제 딴에는 의식적으로 부단히 노력합니다. 배운 후 실천하지 않으면 무소용이니까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일 이어가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