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언지교, 대언불변

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22 / 덕경편 43장(3/3)

by 신아연


새벽비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 비 그치면 겨울이 성큼 다가오겠지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뇔 때마다 술래 곁으로 한발 한발 가까이 오는 아이들처럼. 야금야금, 몰래몰래 등을 치려드는 삶의 고단한 기척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닮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방식으로, 자신을 내세움 없이, 함이 없는 함을 통해 그 강적을 대해야겠지요. 마치 물의 대응과도 같이. 오늘은 말 없는 가르침, '불언지교(不言之敎)'를 말합니다. 무위를 알고 불언지교를 알면 세상 어떤 일도 헤쳐나갈 수 있다는 건데요, 불언지교가 곧 언어의 무위인 거죠.


그런데 정작 무슨 일이 딱 닥쳤을 때 이렇게 하나요? 불언지교는 고사하고 평소에 별 말이 없던 사람조차 따따부따를 시작하죠. 누가누가 잘 따지나 '혀칼'을 휘두릅니다.


저도 한 때(실은 지금도) 따지기라면 둘째가기 서러울 때가 있었지요. 명절날 칼 벼리듯(이 말을 검색하는데- 저는 일단 확인한 후 쓰는 습관이 있거든요- 제가 쓴 글이 네이버에 예시로 나오네요. ㅎ) 불철주야 말과 글을 세련시키고 있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런 제가 도덕경을 공부한 이후로는 의식적으로 입을 다뭅니다. 불언지교의 경험과 효험을 믿어보고 싶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무조건 말하지 말라는 건 아닐 테죠. 유튜브에 나오는 한 정신과 의사는 '충조평판'하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충조평판이란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줄임말이죠. 불언지교의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뭘하냐? 벽처럼 허여멀건하게 멀뚱히 있으라는 건가요? 그건 아니죠. 공감을 해 줘야죠. 공감하기, 이거 보통 일 아닙니다. 어지간하지 않고는 거의 실패합니다. 부단히 훈련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훈련장은 어디인가요? 자식이란 필드죠. 저는 아이들에게 불언지교를 실천해 봅니다.


노자의 불언지교와 함께 장자의 대언불변(大言不辩)을 말하고 싶습니다. 최고의 논쟁은 논쟁하지 않는 것이라는. 참말, 위대한 말, 훌륭한 말, 진리의 말씀은 변론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다툼은 지엽말단을 건드릴 뿐, 근본에 이르게하지 못한다는. 결국 끊임없는 시비를 낳을 뿐입니다.


근원에 이르는 길은 수다한 말과 강한 의지와 확고한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를 다독이고 위로하는 노자의 43장 음성이 빗소리에 섞여 듭니다.


그런 것들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땜질에 불과하다고. 문제의 뿌리에 도달하려면 도의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그것은 연약하고, 부드럽고, 이렇다할 형체가 없고, 말이 없음 속에서 즉 무위로만 가능하다고. 문제해결과 처세에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건 없다고.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부리고

형체가 없는 것이 틈이 없는 곳에도 들어간다.

나는 이런 이치를 보며

무위가 얼마나 유익함을 안다.


말 없는 가르침과

무위의 유익함,

세상에서 이를 따를 만한 것이 없다.


저는 마음에 자잘한 균열이 일 때 책장에서 잠언집을 빼듭니다. 노자의 무위를 담은 듯한 잠언시 한 편을 소개할게요.


마음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

모든 것을 살아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테니까


그렇겠지요? 훗날 돌아보았을 때 살아낸 삶 자체가 해답일테죠? 건반 위를 달리는 손가락처럼, 바위산을 오르는 등산객처럼 우선 묵묵히 살아내고 볼 일입니다.

43장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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