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26 / 덕경편 44장(4/4)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오래갈 수 있다.
만족하고 멈출 줄 아는 것, 오늘은 이 구절을 함께 생각해 봅니다. 중용이 도라는 것을 다시금 새기게 되는데요, 사달은 언제나 양극단에서 일어나지요. 양극단은 왜 일어나지요? 멈출 줄 모르기 때문이지요.
물질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며 현재를 희생하는 것, 사랑이란 이름으로 집착하는 것, 걱정이 지나쳐 망상을 낳는 것, 적당히 화를 내는 데에 그치지 못한 채 분노의 불길에 휩싸이는 것,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멈추지 않는 것 등 심리적으로도 빈대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멈추지 않아서, 그칠 줄 몰라서 스스로 마음의 감옥을 만들어 위태롭고 절망적인 상황을 자초하는 경우 말입니다.
결국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일들을 계속 저지르게 되는데요, 이 정도면 되었다고 여유와 쉼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끝장을 보려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 끝장을 보려는 마음은 또 왜 생길까요. 그 순간을, 당장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절대화하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출구가 없게 되지요. 꼼짝없이 갇혀요.
그런데 보세요. 세상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잖아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가 아니라 사랑은 원래 변하는 거고, 변화 속에서 성숙을 이뤄가는 거지요. 사랑의 달콤함과 이별의 쓰라림, 그 양극단을 경험하며 내면 성숙이란 중심을 찾아갑니다.
도의 가장 큰 특징은 운동성이라고 했지요. 시계추는 양극단을 오가지만 결국 중심에서 안정을 찾습니다. 도는 시계추의 중심처럼 고요히 머뭅니다. 양극단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도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어떤 과정 중에 있다해도 만족하고 자족해야 합니다. 지금 이 위태롭고 혼란스런 상황도 결국은 균형과 중심을 찾아갈 것이라 믿고요.
누가 찾아갑니까. 내 안의 신성이 찾아갑니다. '내 안에 도있다'는 건 그런 의미니까요. 기독교인들은 내 안의 하나님 형상을 볼 것이며, 불교도라면 불성을 만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으신다면 몇 가지 제 방식을 나눠볼게요.
우선 상황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내가 옳네, 네가 틀렸네 다투지 않습니다. 멈춥니다. 다툼을 그칩니다. 불이 번져나가기 전에 주변의 인화성 물질을 치우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감정이 일어날 때 충분히 느낀 후 통과시킵니다. 어떤 감정이든 막거나 피하지 않고 일어나는 그대로 느낀 다음엔 흘러가게 합니다. 저는 호주의 아이들이 몹시 그립고 때때로 걱정이 됩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충분히 그 안에 머뭅니다. 그리고는 흘려 보냅니다. 그 감정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다양한 감정을 케케묵은 창고에 쌓아두거나 고여있게 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 이 순간을 삽니다(이게 가장 어렵습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살 수 있는 것은 현재뿐이며 영원한 현재 속에서 모든 것은 변한다는 걸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순간순간 만족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거지요.
이런 훈련을 계속하면 신의 길, 영적 삶의 모습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도를 따라 살게 됩니다. 이렇게 살면 치이지 않고 지치지 않고 오래갈 수 있습니다.
44장 마칩니다. 45장으로 다음주에 뵐게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