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람의 완전함

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28 / 덕경편 45장(2/4)

by 신아연


어제 글에서 "무위로 할 때 궁극에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고 한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무위로 한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죠. 지금 제 삶이 제가 원했던 모습은 아니듯이요.


저는 남편, 자식들과 함께 살기를 원했고, 가족 안에서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원했습니다. 애썼고 노력했고 전 에너지를 쏟아부었습니다. 제 깜냥으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원하는 것이 반드시 내게 좋은 게 아닐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가족 안에서 행복하기를 원한 것이 무슨 나쁜 건가요. 그래요, 내 주제에 가족은 과분하다 쳐도 이렇게 내 그림자하고만 살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아니, 좋고 나쁨의 구분조차.


<장자>에는 우물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고, 여름 벌레에게 얼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공간적으로 갇혀있고, 시간적으로 제약을 받기 때문이라는 건데요, 우리 또한 다를 바 없지요. 시공간적으로 매우 제한적인 삶을 사는 우리로서는 일의 전모를 가늠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거지요. 내 인생의 전체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혜안을 가지기가 보통사람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퍼즐 몇 조각으로는 전체 그림을 알 수 없듯이.


장자는 또 말합니다. 작은 지혜로는 큰 지혜를 헤아릴 수 없고, 짧은 세월로는 긴 세월을 내다볼 수 없다고. 그러니 지금 내 모습이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내게 적합한 모습일지는 모릅니다. 적어도 저는 그런 여지는 둡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제가 완전히 헤아릴 수는 없을 테지요. 예수조차도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에는 '왜 나를 버리냐고, 내가 뭘 잘못 했냐'며 온전한 자기 긍정을 하지 못했으니 저같이 범속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어제 책을 읽다가 '우주 시나리오'라는 말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지금 요 모양, 요 꼴로 사는 것에 우주적 참견이 관여하고 있다는 건데요, 내 맘에는 안 들지 몰라도 우주적으로 보면 지금 내 모습이 가장 적절하다는 뜻입니다. 시나리오가 쓰여지길 우주에서 쓰여졌으니까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요? 그렇다면 우주가 나를 망친 거라고요? 미안한 말이지만 우주는 절대 망칠 수가 없어요. 도가 완전하듯이. 우주적 질서가 곧 도니까요. 다만 우리 눈에 굽어져 보이고, 불완전해 보일 뿐이죠. 노자도 말씀하시네요.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은 오히려 모자란 듯 보인다고. 하지만 그 작용에는 빈 구석이 없다고.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하나

그 작용에는 어그러짐이 없다.


예수나 붓다의 생애는 완전함의 모본입니다. 노자식으로 말하면 도와 덕을 완전히 실현한 분들이죠. 그러나 우리 눈에,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질 않잖아요. 오히려 바보 같고 멍청이 같잖아요. 모자라 보이잖아요. 왜 저렇게 살까 싶잖아요. 예수처럼, 붓다처럼 살라고 하면 내가 미쳤냐고 할 거잖아요.


그러나 예수나 붓다는 그 모자람으로 인해 스스로를 구원하고 나아가 인류를 구원하지요. 실상 모자란 듯 한 모습은 에고적 차원에서 봤을 때 그런 거지, 영적 관점에서 보면 모자람이 완전함입니다. 무위적으로 봤을 때는 함이 없음이 함이듯이.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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