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33/ 덕경편 46장(3/3)
그러므로 만족함을 아는 만족감이
항상 만족한 것이다.
知足之足,常足矣 (지족지족 상족의), 리드미컬하네요. 만족함을 아는 만족, 그것이야말로 항상하는 만족함이라네요.
'족한 줄 알면 진정한 부자'라고 33장에서도 말했지요. 44장에서는 어느 단계에서 멈출 줄 알면 만족할 수 있다고 했고, 45장에서 추우면 어쩌라고 했지요? 몸을 움직이라고 했지요. 더우면 어쩌라고요?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요. 상황에 그대로 적응할 때 오는 만족함이죠.
노자는 만족함에 대해 이곳저곳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46장에서는 만족을 '아는' 만족이야말로 영원한 만족이라는 '만족의 완결판'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만족을 아는 게 어떤 건지를 아는 게 중요하겠네요.
제가 46장 첫 시간에 doing, having, being을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뭔가를 하지요. doing입니다. 그런데 doing의 목적이 having에 있으면 영원히 불만족할 수밖에 없지요.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하는 소유욕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소유욕' 아닙니까. 가지려고 하는 것에는 충분히 가졌다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지요. 가지려고 하는 것에는 더더욱 가지려고 하는 스스로의 동력이 작동하니까요.
그런데 doing의 목적이 being에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being은 존재하는 삶입니다. 존재는 이미 자기 충족적입니다. 아무리 작은 생명도, 우리 눈에 하찮은 미물도 완전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우리 또한 이미 존재적으로 완전합니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 안에 도(道)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불성이 내재하기 때문입니다. 참나가 받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와 합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부족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돈이 없어 걱정입니까? 절대 안 굶어요. 다 살아집니다. 제가 경험해 봐서 압니다. 외롭습니까? 내 안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는데 외로울 게 뭐가 있습니까. 설령 자식이 죽었다 해도, 아니, 자신이 죽어도 온전히 존재할 수 있습니다. 겉사람은 윤회하지만 속사람은 어차피 도 안에서 하나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being할 수 있을까요? 말 그대로 날마다 '그냥' 살면 됩니다. 살아있다는 자체로 기쁘게 사는 거지요. 이런 삶이 영성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항상 뭔가를 해야 하잖아요. 그렇게 사는 건 무미건조한 것 같잖아요.
많이 들어 본 말 중에 '공부해서 남 주냐'는 게 있지요. 그런데 이제는 '공부해서 남 주자'로 바꿔 보자는 거죠. 그러면 적극적으로 being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제 자신을 위한 것도 있지만 이렇게 작으나마 나눌 수 있으니 좋잖아요(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몰라도). 글 써서 남 주듯 돈 벌어서 남 주고, 전공 살려 남 주고, 내 시간을 남 주고, 내 마음도 나눠주고, 남을 위해 기도하고... 그렇게 내 것을 주다보면 만족감은 저절로 생길 것입니다.
존재적 삶을 살 때 영원한 만족이 옵니다. 존재적 삶이란 도의 삶, 성령의 삶, 불성의 삶, 참나의 삶, 우주합일의 삶이라고 바꿔 말할 수 있겠습니다.
46장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제 46 장
세상에 도가 실현되면
전쟁에 쓰던 말로 농사를 짓고
세상에 도가 실현되지 않으면
말들이 전쟁터에서 새끼를 낳는다.
죄로 말하자면
욕심을 부리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화로 말하자면
족함을 모르는 것보다 큰 것이 없고
허물로 말하자면
얻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만족함을 아는 만족감이
항상 만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