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35/ 덕경편 47장(2/3)
새벽 공기 싸~ 하네요. 창을 열었다가 바로 닫았습니다. 어제 노자 말씀처럼 창 너머에 도가 있지 않아서 닫은 게 아니라 추워서요.^^
오늘 노자는 행복의 파랑새가 내 안에 있듯이 지혜의 파랑새도 내 안에 있다고 하네요. 멀리가면 갈수록 아는 것은 더 적어진다고 하면서.
멀리 간다는 말은 지식을 축적한다는 뜻이지요. 그럴수록 적어지는 것은 지혜지요. 우리는 배우는 것을 큰 미덕으로 생각합니다. 나이들어도 공부하는 걸 좋아하고 자랑스러워 하지요. 유학의 시조 공자의 후예이자, 유학의 완성자 퇴계의 후손이라 그런가 봐요.
그런데요, 지식이 쌓일수록, 노자식 표현으로 하면 '멀리갈수록' 혼란스럽고, 허영스럽고, 허세 '쩔죠'. 지식이 지혜를 주진 못하기 때문이죠. 헛똑똑이들이 그래서 많은 거죠. 노자는 공자 자체를 애송이로 치부하니 공자를 좇아 학습하기 좋아하는 우리야 말해 뭐할까요.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유학 가던 길에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깨달은 것처럼 내 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아는 것은 많지만 확신하는 것은 적고, 지식 속에서 우리는 지혜를 잃었습니다. 바쁘게 돌아치는 생활 속에서 인생을 잃었습니다.
진실로 참된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노자는 56장에서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한 거지요. 뭘 아는 사람이요? 지혜를 아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지요. 모르는 것 없이 안다고 설치는 사람은 지혜에 대해서만큼은 무지한 사람입니다.
저는 침묵과 침잠 속에서 배웠습니다. 이혼 후 8년 간을, 그리고 짧게는 지난 1년 반을(가까운 친구와 지인들은 압니다. 또 한 번의 시련을 통과하는 저를 지켜보며 함께 기도해 주셨지요) 지혜의 풀무질과 영성의 연금술을 거치는 동안 애벌레가 나비의 날개를 달고, 미운오리새끼가 백조의 깃을 꽂듯 환골탈태하는 제 자신을 발견해 가고 있습니다.
자신 안에 머무는 것은 실로 어렵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일이기조차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제 자신에게 잔잔한 자부심을 느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을 박차고 나가거나, 창을 타 넘어서라도 자기로부터의 도피를 꾀하니까요. 하지만 그럴수록 진리의 불꽃은 사그라들고 희미해집니다. 지혜의 책자는 얄팍해지고 앙상해져 갑니다. 그 대가는 결국 자신이 치릅니다.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제 47 장
문밖을 나가지 않고도
세상을 알며
창밖을 엿보지 않고도
하늘의 도를 본다.
멀리가면 갈수록
아는 것은 점점 적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다니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훤하고
하지 않고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