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37/ 덕경편 48장(1/3)
저는 꼬박 책을 읽습니다. 건강이 되는 한 생의 남은 시간을 책 읽고 글 쓰며 보내고 싶습니다. 단순하게 더욱 단순하게 살아가는, 저의 위도일손(爲道日損)의 방편입니다. 저의 읽고 쓰기는 채움을 위한 것이 아닌 비움을 위한 것이지요. 비우기 위해 채우는 거죠.
48장 시작합니다.
배움을 행하면 날로 늘어가고
도를 행하면 날로 줄어진다.
줄어들고 줄어들어
무위에 이르는구나.
무위에 이르면 되지 않는 일이 없다.
천하를 얻으려면
억지로 일을 꾸미지 않아야 한다.
억지로 일을 꾸미면
천하를 얻기에는 부족하다.
도는 물고기의 물 같은 거 아닐까요. 구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태어남과 동시에 주어져 있는. 우리 모두는 물 속에 살면서도 목이 마른 물고기처럼 늘 헐떡거립니다.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가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공허하고 허전해서 뭔가를 찾아 헤매지요. 외부의 것으로 그 구멍을 메우려고 합니다. 그렇게 위학일익(爲學日益)으로 경쟁하고 쟁취하느라 일생이 고단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완전하기 짝이 없더라는 거죠. 왜냐하면 무한한 세계를 유한한 존재가 알려고 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며, 위태로운 줄 알면서도 계속하는 것은 더욱 위태로운 일이니까요. 하루살이가 인간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수 없고, 여름벌레는 겨울에 대해 아예 모르고,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를 찾아갈 수 없으니까요.
제가 8년 전 한국에 돌아와 돈도 없고 일도 없어서(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김밥 한 줄 사들고 시내 도서관이나 광화문 교보문고에 처박혀 온종일 책을 읽었습니다. 개점에서 폐점시간까지 몇 년을 그랬습니다. 그때 주로 느낀 감정은 좌절감과 절망감이었습니다. 하루에 한 권, 아니 10권을 읽는다 해도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는 책을 다 읽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아니 어느 날 다 읽었다 쳐도 그 다음날이면 신간이 들어올테니, 죽고 나서 몇 생을 다시 와서 읽는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지요.
날로 배움을 행하는 건 그런 측면이 있죠.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책 읽기처럼 읽을수록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면서 졸아드는 측면.
배우는 거라면 둘째 가기 서러운, 아니 둘째 가면 노여운 공자가 예의 배움을 얻기 위해 수만 리의 여정을 마다 않고 노자를 찾아 가지요. 그런데 그 결과는 어땠나요? 노자한테 '쫑코'만 듣잖아요. 제발 좀 허망한 집념과 교만을 버리고, 별 것도 없으면서 잘난 척 하지 말라고. 너 자신을 알라했던 소크라테스의 일갈과 같은 맥락이죠.
유위를 그치고 무위의 도를 찾으라는 노자. 배울수록 늘어나는 것은 욕망과 근심과 불만족뿐이라며.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 설 공자가 아니죠.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며 '상갓집 개' 꼴로 끝끝내 바깥을 헤매고 다니죠. 애초 그랬으니 노자한테까지 갔던 거죠.
노자는 그런 공자에게 '그 도는 바로 네 안에 있다'며 한심해 하는 거구요.
공자의 '배움'의 도와 노자의 '비움'의 도!
선택의 여지 없이 우리는 인생의 전반부를 공자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후반 생은 노자적으로 살아보는 게 균형적으로 맞지 않을까요? 적어도 인생 후반에 추레하니 상갓집 개꼴을 면하기 위해서라도.
내일 이어가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