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나처럼 알아주는 사람

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42 / 덕경편 49장(3/4)

by 신아연


어제는 온전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요. 바로 온전함 때문인 거죠. 기독교에서는 죄를 '과녘에서 벗어난 상태'로 봅니다. 과녘을 다시 조절해 주면 온전함을 회복하겠지요. 그래서 착하지 않은 사람, 신의를 저버린 사람도 내치지 않아야 온전함이 온전해지겠지요.


성인은 사람들을 대할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마음과 하나가 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로선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몇 십 년을 함께 살아온 배우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쉬운가요, 어디? 오래 되고 익숙한 관계일수록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내가 만든 그대로' 받아들이죠.


다른 사람에게 저는 크리스털 대접을 받지만 제 전 남편은 저를 강화유리로 다뤘죠. 뿐만 아니라 저의 두 언니들은 저를 아주 업신여기죠. 자신들의 기준으로 볼 때 제가 가진 게 없으니. 예수님도 선지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하셨듯이 저도 돌아온 모국에서 의연히 구박을 감내합니다.^^ 제 전 남편이나 언니들이 저를 그렇게 여기는 데는 제게 '그런 측면'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온전함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측면은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런 측면', 그것이 우리가 상대를 보는 각자의 통로이자 대롱입니다. 그 통로, 그 대롱으로만 보기 때문에 전체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가 없는 거지요. 성인은 그런 측면, 저런 측면, 이런 측면을 다 봅니다. 전체를 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존재는 깊은 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 표피, 빙산의 일각보다 더 작은 부분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오랫 동안 그 사람과 연인, 친구, 동료라고 해서,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 내 형제라고 해서 잘 안다,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가까울수록 더 모를 수도 있지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위도일손(爲道日損)한다면, 내가 저 사람을 안다는 생각을 날마다 덜어내고 또 덜어낸다면 그 사람의 본 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그만큼 다가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잘 아는 관계일수록 나날이 내 생각, 내 기준을 더하게 되잖아요. 그것이 견고해지고 강고해져서 '나는 저 사람 다 안다, 척 하면 삼천리다' 이러잖아요. 그렇게 다 아는데 왜 관계가 틀어집니까. 왜 물처럼 흐르지 않습니까. 왜 갈수록 틀어막혀서 터지기 직전입니까.


성인은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했지요. 어떻게 그게 가능하다고 했지요? 고정된 마음이 없기(無常心)에 가능하다고 했지요. 내 마음이라고 할 게 따로 없으니 지킬 마음이 없고, 판단 기준이나 너와 나라는 분리의 마음이 없으니 이 마음, 저 마음, 그 마음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거지요. 이 마음, 저 마음, 그 마음이 다 내 마음인 거지요.


성인(聖人)의 '성(聖)'자를 보세요. '듣고 말하는 데 짱'인 사람인 거죠. 듣고 말하되 이 사람, 저 사람, 그 사람의 귀로 듣고, 이 사람, 저 사람, 그 사람의 입으로 말하는 거죠. 모든 사람의 귀로 듣고 모든 사람의 입으로 말하는 거죠. 모든 사람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는 거죠.


49장,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제 49 장


성인은 고정된 마음이 없기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는다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도 착하게 대하니

그래서 덕이 이루어진다


진실한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고

진실하지 않은 사람도 진실하게 대하니

그래서 신의가 이루어진다


성인은 사람들을 대할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마음과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눈과 귀를 세워 분별심을 일으키지만

성인은 모든 이들을 어린아이 상태로 되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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