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43 / 덕경편 49장(4/4)
요즘은 사람을 만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있는 그대로', '상대의 마음과 하나되기'에 의식적으로 집중합니다. 공부한 것을 실험적으로 실천합니다.
그럼 그 전에는 어떻게 대했냐고요? 분별심을 일으켰지요. 상대가 나보다 잘났는지 못났는지, 내게 이로운 사람일지 해로운 사람일지를 파악하려고 머리 속이 분주했지요. 우월감과 열등감의 자리에 번갈아 올라앉아 음메 기죽어, 음메 기살아의 시소를 타면서.
우리는 오감을 동원해서 사람을 스캐닝하죠. 순간에, 찰나에 자동으로 그렇게 하죠. 무의식적으로 한다는 뜻이죠. 첫인상이란 게 그런 거잖아요. 호감, 비호감의 기준은 결국 자기 안의 잣대에서 정해지는 거지, 상대 자체와는 무관한 일이죠.
'첫인상'이란 말 자체가 분별심입니다. 어린 아이들 사이에서 첫인상이 좋아서 친구가 됐다고 하는 말 못 들어봤잖아요. 모르는 사람들하고 놀라고 하면 애하고, 어른하고 누가 더 잘 놉니까. 어른들은 아예 함께 있으려고도 않을 자리에서 애들은 바로 뒤섞여 놉니다. 아이들은 동물하고도 잘 놉니다. 분별심이 없어서 그렇지요. 상대 안에서 같은 생명체라는 공통점만 보기 때문에 그렇지요.
사람들은 눈과 귀를 세워 분별심을 일으키지만
성인은 모든 이들을 어린아이 상태로 되돌린다
그런데 성인은 그게 가능한 사람이라는 거지요. 본인이 가능할 뿐더러 모든 사람들을 어린아이 상태로 돌려버린다고 하네요. 즉, 우리의 분별심을 내려놓게 만든다는 거지요.
"어른들도 처음에는 다 어린아이였다", <어린 왕자>를 쓴 생텍쥐페리의 말입니다. 온갖 기준, 온갖 판단, 온갖 평가의 옷을 껴입기 이전에 벌거벗은 본래의 생명력으로만 충만했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지요. 머리 이전에 가슴으로, 논리 이전에 직관으로 사람과 사물을 대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지요.
이제는 분별심의 옷을 벗어야 할 때입니다. 평생 쓰고 살아서 쓰고 있는지도 모르게 된 가면을 벗어야 할 때입니다. 어떤 이는 드물게 그러한 '축복'을 누리기도 하는데, 바로 예기치 않은 고난과 고통을 마주할 때지요. 삶의 고통을 겪을 때 우리는 기로를 맞이 합니다. 훌훌 벗고 자유로운 생명력으로 날아오를 것인가, 아니면 더 두꺼운 옷과 딱딱한 가면으로 무장하여 세상과 대치할 것인가. 저는 운좋게도 고통을 당할 때마다 가면이 헐거워지고 마음 문이 열리는 쪽인 것 같습니다.
있는 그대로 사람을 대하고, 그 마음과 하나가 되는 길은 사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자체가 사랑입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키워가는 것이 어린아이처럼, 성인처럼 되는 길이며, 그 통로는 나의 고통 속에서 발견될 때가 많습니다. 살면서 겪는 우리의 갖가지 고통이 무의미하지 않은 이유는 고통을 통해 타인을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인생의 의미, 삶의 목적은 그게 전부가 아닐까요?
내일은 50장을 보도록 하지요. 고맙습니다.
제 49 장
성인은 고정된 마음이 없기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는다
착한 사람을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도 착하게 대하니
그래서 덕이 이루어진다
진실한 사람을 진실하게 대하고
진실하지 않은 사람도 진실하게 대하니
그래서 신의가 이루어진다
성인은 사람들을 대할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 마음과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눈과 귀를 세워 분별심을 일으키지만
성인은 모든 이들을 어린아이 상태로 되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