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잘 다스리려면

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46 / 덕경편 50장(3/4)

by 신아연


앞절에서는 세상 사람들의 세 모습에 대해 말했습니다. 사는 것처럼 사는 사람이 30%, 살았으되 죽었다고 할 사람 또한 30%, 제 딴엔 잘 살자고 하는 짓이 실은 죽을 짓인 사람도 30%라고. 그런데 세 부류 모두 진정 잘 사는 거라고 할 수 없다고. 이리 살든, 저리 살든 사는 것을 너무 좋아하고 사는 것에만 매달려 있는 모습이니까. 그러다보니 우쭐도 심하고 좌절도 심하게 되는 거라고. 온쪽이 아닌 반쪽을 살게 된다고.


여기까지 했지요?


그렇다면 노자가 볼 때 진정으로 잘 사는 사람, 반쪽이 아닌 온쪽을 사는 사람, 삶을 잘 다스리는 나머지 10%는 어떤 사람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잘 사는 길일까요?


듣자하니 삶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험한 길을 가면서도

코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군대에 가도 갑옷으로 무장하지 않는다

코뿔소는 그 뿔을 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는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고

적군은 무기를 겨룰 곳이 없다


이런 사람이라네요. 이게 다 무슨 소린가요? 한 마디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좋고 싫고, 취사선택없이, 피하지 않고, 일어나는대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고난을 만나도 그 고난을 온몸으로 통과하는 사람입니다. 대립, 상극, 상반되는 것들을 함께 껴안아 버리는 사람입니다. 코뿔소도 호랑이도 적군도 이런 사람은 건드릴 수가 없어요. 건드려 봤자인 거죠. 그것들을 내 몸처럼 여기니까요.


제가 호주에서 교회 주일학교 교사였을 때 아이들하고 불렀던 찬송가 중에 이런 게 있었어요.


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오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독사 굴에

어린 아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나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오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독사 굴에 손을 넣어도 물지 않고, 사자들이 어린 양과 함께 노는 대목이 오늘 살피고 있는 도덕경 50장과 일치하네요. 사막의 샘, 꽃, 숲도 대립과 상극의 포용을 상징하고요.


호주에 살 때, 지인이 오밤중에 음주졸음운전으로 큰 사고를 내서 폐차했을 정도였지만 본인은 다친 데 하나 없이 멀쩡했던 일이 있었어요. 모두들 기적이라고 했지만 실은 그 사람이 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거죠. 술을 '이빠이' 먹고 졸기까지 했다면 의식이 반쯤 나갔을 테니 저항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저항하지 못했던 거죠. 온몸으로 사고 상황을 그대로 받아냄으로써 오히려 살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 삶도 그와 같다는 게 노자말씀입니다. 고난 앞에 힘을 완전히 뺄 때, 살고자 발버둥치지 않을 때, 사는 건 좋고 죽는 건 싫고하는 이분법을 내려놓을 때, 삶의 뜨락에 죽음을 들여놓을 때 온전해 진다는 건데요, 내일 마저 보겠습니다.



제 50 장


일껏 태어나서 죽는 길을 가는 구나

살았다고 할 사람이 열에 셋이고

죽었다고 할 사람도 열에 셋이며

딴에는 산다고 사는 데

결국 죽음으로 가는 사람 또한 열에 셋이구나.


왜 이런가?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듣자하니 삶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험한 길을 가면서도

코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군대에 가도 갑옷으로 무장하지 않는다

코뿔소는 그 뿔을 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는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고

적군은 무기를 겨룰 곳이 없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여지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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