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47 / 덕경편 50장(4/4)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니까요. 지나가도록 내버려 둬야죠. 주사 맞을 때 긴장해서 힘을 주면 그 부위에 멍이 듭니다. '삶의 주사'에도 강하게 저항할수록, 거부할수록 후유증을 남깁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힘을 줍니까. 결국 두 가지 때문이지요. 욕망과 두려움, 이 두 축이 우리 삶을 끌어당기거나 반대로 밀쳐내기 때문에, 이른바 욕망과 두려움의 밀당으로 인해 삶 자체가 위축됩니다. 밀당하는 연애가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그런 잔머리 굴리다가 연인을 잃게 됩니다.
삶도 그와 같다는 게 노자의 말입니다. 잔머리 굴리지 말라는 거죠. 욕망 중에 가장 큰 욕망은 살려는 욕망이고, 두려움 중에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 아닌가요? 삶만 가까이 하고 죽음은 안 가지겠다고 하면 앞면만 있고 뒷면은 없는 동전을 찾는 것과 같지요. 그러니 구차하게 구하지 말고, 요리조리 피해다니지 말고 그 둘을 세트로 포착하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여지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죽기를 각오한 사람에겐 두려울 게 있을 리 없지요. 죽어라 죽어라하는 상황에서도 살겠다는 사람에겐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지요. 결국 이 둘은 하나입니다. 생사의 이분법을 놓아버린 사람만이 온전한 삶을 누립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분법으로 온쪽이 아닌 반쪽의 삶을 삽니까. 너와 나로, 남자와 여자로, 젊은이와 늙은이로, 잘 생긴 사람과 못 생긴 사람으로, 부자와 빈자로, 배운 자와 못 배운 자로...., 등등 이분법의 늪에 빠져 결국은 그 나눔이 다름이 되는 게 아니라 틀림이 되어 갈등을 유발하고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병을 얻습니다.
우선 자기 자신을 못 받아들이잖아요. 이런저런 가면을 쓰고 역할극을 하며 이걸 해야 한다, 저건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면은 좋은데 저런 면은 꼴보기 싫다며 자기를 들들 볶지요. 도무지 있는 그대로, 민낯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주질 않잖아요.
외경으로 분류되는 도마복음에는 예수님의 이런 음성이 실려 있습니다.
'그대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수 있을 때, 안을 바깥처럼, 바깥을 안처럼, 위를 아래로, 아래를 위로, 남성과 여성을 하나로 만들 수 있어서 더 이상 남성도 여성도 아니게 될 때' 그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예수님과 노자가 같은 말씀을 하고 있네요. 노자는 이런 사람이 열에 하나라고 했는데, 과연 그렇게나 많을까 의문입니다. 노자 시대에는 그랬는지 모르지만 요즘 사람 중에는 훨씬 적지 싶네요. 하긴 저는 다른 건 몰라도 더 이상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 같긴 해요. 수준이 높아져서가 아니라 폐경이 되어서 그렇겠죠? ㅎㅎ
우리 시대는 에고와 아상이 너무 강합니다. 앞서 말한 열에 아홉 사람들은 모두 에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이죠. 에고는 나와 너를 철저히 분리합니다. 삶과 죽음도 깔끔하게 떼어놓습니다. 사는 데만 골몰해서 생전 안 죽을 것처럼 굴죠. 우리 전부 그러잖아요. 죽음은 언제나 남의 일이죠. 이렇게 살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죽음을 마주치는 순간 어떻게 감당할지 저부터가 걱정입니다. 죽음, 그낯섦에 너무 놀라 심장마비로 죽겠지요, 아마.
도덕경 50장을 이렇게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제 50 장
일껏 태어나서 죽는 길을 가는 구나
살았다고 할 사람이 열에 셋이고
죽었다고 할 사람도 열에 셋이며
딴에는 산다고 사는 데
결국 죽음으로 가는 사람 또한 열에 셋이구나.
왜 이런가?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듣자하니 삶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험한 길을 가면서도
코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군대에 가도 갑옷으로 무장하지 않는다
코뿔소는 그 뿔을 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는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고
적군은 무기를 겨룰 곳이 없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여지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