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보듬는 도덕경 62 / 덕경편 56장(1/3)
오늘은 도덕경에서 가장 유명한 장을 만납니다. 어디가서 도덕경에 대해 아는 척 좀 하고 싶다면 56장만 아는 척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제대로 배우신다면 아는 척하지 못하실 겁니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고 했으니까요.
저는 지난 금요일부터 3일 내리 56장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입을 다물고, 얽힌 것을 풀고,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는 성인(聖人)되는 훈련(이라 하면 너무 거창하게 들리시겠지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 모습이 성화(聖化) 되어가는 중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성경과 도덕경을 배우는 사람은 결국 성화의 길을 걷는 사람이니까요. 그 길은 평생의 갈 길이구요.
성화가 무엇인가요? 56장 둘째 단락에서 살피겠습니다.
56장은 성인의 모습과 행동을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우리도 이대로 행하면 한 걸음 성인에 다가섭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제 56 장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폐쇄하며
그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그 얽힌 것을 풀고
그 빛을 희미하게 하고
그 티끌과 하나된다.
이것을 신비스러운 하나(현동玄同)라 한다.
그러므로 (도를 터득한 사람은)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으며
이롭게 할 수도 없고
해롭게 할 수도 없으며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기에 천하가 이를 귀하게 여긴다.
오늘은 첫 구절만 보겠습니다.
"지자불언 언자부지(知者不言 言者不知),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라서 어떻게 풀어야할지 망설여집니다. 게다가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고 했으니.
우선 '뭐에 대해' 알고 모르고인지 그 대상에 주목해 보죠. 두 가지로 풀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 일상에서 말하는 앎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요즘 대선 후보들이 저마다 떠들어 대지만 실상을 제대로 '알고' 말하는 것 같진 않지요. 허세와 허풍의 앎이지요. 또 우리가 "나 저 사람에 대해 잘 안다"고 할 때도 그 앎은 이미 묵은 앎, 선입견적 앎일 때가 많지요. 저는 집에서 존재감 없는 막내인데다 자랄 때 별로 착하지 않아서 지금도 가족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하지요. 그래서 나이가 60이 되어도 제가 어렸을 때 자기들이 아는 저를 저의 모든 모습이라 여기지요. 잘못된 앎인 거지요. 우물안 개구리는 특히 아는 게 많지요.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니까요. 그렇게 자기 우물에 갇혀 있던 개구리가 바다를 보게 된다면? 말을 잃겠지요. 그래도 계속 씨불일 수 있다면 그야말로 입 큰 개구리겠지요.
자,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나요? 시시각각 변하는 실상을 변하지 않는 언어와 고정된 사고체계에 우겨 넣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을 보세요. 자연에 대해 완벽히 설명할 수 있나요? 할 수 있다고 치고, 다 설명했다 하는 순간 자연은 이미 변해있을 테지요. 어제 알던 사람이 오늘은 딴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 실상이 이러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함부로 안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거지요. 자연히 입을 다물게 되지요. 반면 촉새 같은 떠벌이들을 보세요. 얼마나 제대로 알고 지껄이는 걸까요?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사람은 또 뭔가요?
그럼 또 다른 앎은 어떤 앎일까요? 그 앎은 언어에는 아예 잡히지도 않는 앎입니다. 생각으로 드러내고, 감정으로 표현하며, 말로 떠들어 댈래야 댈 수가 없는 대상에 대한 앎입니다. 오감으로 잡히지 않고 이성과 감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앎, 56장에서 말하는 앎은 그러한 것에 대한 앎입니다.
내일 계속하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