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동행 그후
"보통 사람은 죽음이 끝이지만 글 쓰는 사람은 다음이 있어. 죽음에 대해 쓰는 거지. 벼랑 끝에서 한 발짝 더 갈 수 있다네."
지난 2월에 돌아가신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이야기『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말입니다. 쓰고 쓰고 또 쓰다가 마지막에는 죽음에 대해 쓰는 사람, 죽음을 기록하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숙명이자 특권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저자김지수, 이어령출판열림원발매2021.10.28.
저는 어제 분노에 찬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본인의 의지로 죽고자 하는 61세 남성이었습니다. 조력사를 고려 중인 거지요. 스위스 안락사 단체 몇 군데에 이미 가입 서류 신청도 했다고 했습니다.
2주전 제가 중앙일보와 했던 인터뷰의 여파임을 짐작했고, 아차 싶어 그 길로 검색을 해 보니 네이버 지식 iN에 제 연락처를 꼭 알고 싶다는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제게 죽음을 상의하고 싶은 또다른 사람이겠지요.
행복 전도사처럼 이러다 '죽음 전도사'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받고 싶지 않은 잔이 제 앞에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은 무거운 죽음 보따리를 제 앞에서 끌러 펼쳐보이는 것으로 그 순간 약간의 위로를 얻지만 함께 들여다 보는 저는 그야말로 '죽을 맛'입니다. 가뜩이나 우울한 기질인 저를 우울의 우물로 끌어들이고 있으니...
그럼에도 어느 새 저는 이어령 선생의 말처럼 '죽음을 쓰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어제도 온 종일 죽음에 대한 글을 쓰고, 죽음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책을 내기로 한, 제가 경험한 스위스 안락사에 관한 내용이지요.
아까 '분노에 찬 메일'이라고 했지요? 그분은 스위스의 정신 의학자 퀴블러로스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심리적 5단계(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반응 중 2단계를 겪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분노의 계단에 아슬아슬 발을 걸친 채 억울한 마음을 제게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수용의 단계에서 죽음은 아름다워집니다. 빛이 납니다. 승화됩니다. 삶도 덩달아 완성됩니다. 퀴블러로스는 수용 단계에 이를 수만 있다면 위대한 영적 빛과 철학적 평온을 맞이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성인 급 죽음 수준인 거지요.
보통 사람인 우리 대부분은 이르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광야를 헤매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부정, 분노, 타협, 우울의 상태를 반복하다가 가나안의 복된 죽음을 맞지 못한 채 광야의 죽음을 당하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수용'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어떻게?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