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배내옷, 영성의 수의

by 신아연


"그럼 자아로서의 나는 뭐며, 영혼으로서의 나는 뭐냐? 다음 시간에 계속하지요." 라며 지난 시간을 마쳤지요.


여러분들이 월~수요일, 노자이야기보다 목요일 죽음이야기에 관심을 좀 더 가지시는 것으로 압니다. 우리의 본능이 그렇게 이끄는 건지도 모르죠. 삶의 본능인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 사이에서 목요일만큼은 죽음 본능 쪽으로 기우는 것인지도요.


죽음의 5단계(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 가운데 죽음을 비로소 인정하는 수용의 단계에는 누구나, 아무나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속된 말로 발악을 하거나 공포에 떨거나 질린 상태로 죽는 게 아니라 존엄하게, 의연하게, 평온하게 눈을 감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거지요. 겉으로 그런다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에서 말입니다.


자아적 차원의 인간과 영적 차원의 인간이 여기서 갈립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제가 이야기를 하나 할게요. 그러다 오늘도 시간이 다 갈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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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목사님 아시죠? 청계천 빈민촌 선교 및 두레공동체를 만든 분이죠. 이 분이 젊었을 때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엘 갔더랍니다. 0.7평 독방에 갇혔는데 팔을 완전히 펼 수 없는 공간이었다네요. 저도 고시방 비슷한 데서 살아봐서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됩니다. 다른 책은 다 뺏고 성경책만 하나 넣어주더래요. 감옥에서는 성경을 '이스라엘 무협지'라고 한다네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오직 성경만 읽는 거지요. 6번째 읽는데 성경 속 활자가 살아서 움직이더랍니다. '나쁜 놈은 나를 가둔 박정희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회개의 눈물이 쏟아지면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깊이 만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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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와 동갑인 김지하 시인도 같은 사건으로 같은 감옥에 갇혔답니다. 두 분이 나란히 독방에 수감되신 거지요. 할 일이 하나도 없으니까 역시 성경을 읽는데 이 분은 예수에 대해 말하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했답니다. 똑 같이 성경을 읽었지만 김 시인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만, 활자로만 만난 거지요. 출옥 후 피폐해져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지만 예의 지성에서 나오는 강한 정신력으로 다시 건강을 추스렀다고 해요. 똑 같은 환경, 똑 같은 시간 속에서 한 사람은 축복을, 한 사람은 고초를 겪은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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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aronburden, 출처 Unsplash


두 분 속에서 저는 영적 인간과 지적 인간의 극명한 대비를 봅니다. 사람이 지적이기도 힘들지만 영적이기는 힘들다기 보다는 어떤 신비가 작용합니다. 말로는 설명이 안되는, 밖에서 주어지는 인격적인 터치가 있어야 하는 거지요. 내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사람', 요즘 제가 변신하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이지요. 오죽하면 책을 다 끊었겠습니까.


사람은 본능적 부류, 지적 부류, 영적 부류로 나눌 수 있지요. 지적인 사람이 되는 데에도 타고난 소질이 있어야 하지만(가령 책을 전혀 안 읽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여튼 인간의 힘 영역에 속하지요. 그렇게 해서 소위 인문적 인간이 되는 거지요.


지적인 인간의 문제는 '자아가 충만'해 진다는 데 있습니다. 무턱대고 자존심이 세집니다. 자기 생각으로 꽉 차게 되니까요. 내가 옳으니까요. 내가 내 삶의 주인이니까요. 희안하게도 자존심에 반비례해서 자존감은 낮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신력과 의지는 강합니다. 얼마 전까지의 저 같은 사람입니다. 실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다시 죽음이야기로 돌아가, 본능적 삶이야 말할 것도 없고 지적 삶 역시 죽음의 수용 단계로 나가기 어렵습니다. 죽음 앞에서까지 자기 고집을 부리면서 제대로 못 죽는다는 뜻입니다.


죽음 앞에서만큼은 자아를 벗어야 합니다. 자기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마치 배영할 때처럼 편안히 물 위에 누워야 하는 거지요. 어떤 물? 영성의 물이요. 영혼으로서의 나를 만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영성의 배내옷'을 입고 삶을 시작하여 '영성의 수의'를 입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 그것이 진리라는 걸 저는 나이 60에 깨달았습니다. 너무 늦지는 않았지만 많이 늦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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