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가정의 달에 아주 따스하고 감동적인 육필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가정이 무너져서 5월이 되면 마음이 스산한 사람들이 많지요. 저도 그 중 한 사람으로서 '이름 붙은 달, 이름 붙은 날'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슬프고 아프니까요.
제게는 심적으로 물적으로 어려운 처지의 독자들이 몇 분 계십니다. 제가 몰라서 그렇지 더 계실지도 모르지요. 저는 그분들을 많이 아낍니다. 제 글이 한 줌 위로가 되고 한 뼘 희망이 된다고 하실 때마다 감사를 너머 숙연해집니다. 오늘 소개할 분은 저와의 카톡 대화를 본인의 카톡 프로필에까지 올려놓으셨다고 해요. 제 한 마디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면서.
편지를 읽으며 이혼 후 수중의 돈 300만 원으로 원룸을 전전한 그 분의 처지와 제 처지가 겹쳐져서 눈물이 났습니다. 저도 그때 300만 원이 전부였거든요.
지금 이 순간도 눈물이 납니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납니다. 이 못난 내가 정말 누군가를 위로하는 역할을 하는가 싶어서...
안녕하세요, 신아연 작가님!
저는 올해 53세로 비록 곤궁한 생활이지만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독자입니다. 늦게 결혼하여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매가 있습니다. 아이들 엄마와는 현재 이혼 상태이며 그때 아이들은 4살, 3살이었지요. 당시 수중의 돈은 300만 원, 이 돈으로 분당 외진 원룸에 보증금을 걸고 20만 원 짜리 월세를 얻었습니다. 작은 사업을 시작하며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려야 했고 미친 듯이 일에 매달렸지만 이자가 밀려 밤낮으로 협박에 시달렸지요. 이후 낮에는 식당 설거지를, 밤에는 호프집 서빙을 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지요. 그렇게 버는 족족 대부업체에 주고 나니 아이들 생활비 줄 돈이 없는 거에요.
고민 끝에 친구 어머니께 용기내어 100만 원을 빌려 애들 엄마에게 입금해 주고, 집주인을 찾아갔지요. 도저히 월세를 낼 형편이 안 된다며 사정을 말씀 드리고 계약을 해지한 후 그간 밀린 월세를 제한 100만 원을 받아 또 애들 엄마한테 보냈습니다. 마음이 편하고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당장 거처할 곳이 없어졌으니 찜질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지요. 살림살이를 모두 처분하고 옷만 대충 챙겨 제 오래 된 차에 실었습니다. 인력 사무실을 찾아가 건설 현장 일용직을 알선 받아 다음날부터 일하러 나갔습니다. 저녁 늦게 고단한 몸으로 찜질방에 돌아와 몰래 속옷과 양말을 빠는데 그만 주인에게 들켰습니다. 미안하다고 한 후 구석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다음 날 간밤에 빨아 둔 속옷과 양말을 비닐 봉지에 담아 출근하면서 차안에 펴서 말려두고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자동차 엔진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수리비가 더 나올 것 같아 폐차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력 사무실 일은 모두 험하고 힘든 일이라 하루 일과를 마치면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별거 중이던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혼을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고심 끝에 법원에서 합의 이혼을 하고 나니 아이들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며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일하러 나가야 했지요. 무리를 했던지 코피가 나고 머리가 아프고 몸살기가 느껴져서 현장 감독관에게 말씀드리고 찜질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근처 교회에 가서 눈물을 펑펑 흘렸습니다. 기도를 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아픈 몸을 추스러 예배실을 나오는데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제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책의 구절들이 지금 제 인생의 고비마다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빨래를 못 하니 찜질방 생활을 계속 할 수 없어 고시원을 찾아갔습니다. 듣던 대로 지옥 같이 열악한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빨래는 할 수 있지 않나 하고 스스로를 달래며 고시원 생활을 하는 동안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이 하염없이 났습니다. 몸도 여기저기 아프고 정신적으로도 최악의 상황이지만 일을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빠로서 아이들의 생계는 목숨 걸고 지켜야 했으니까요. 저는 다시 생각했지요. 반드시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하고.
동사무소 복지 담당자를 만났습니다. 기초 생활 수급자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동사무소에서 긴급 복지금이 나올 거라는 말에 기쁨과 감사로 한 숨 돌린 후 그 날은 고시방에서 푹 쉬고 다음 날 약간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일을 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다소 긴장이 풀린 탓이었는지 공사 현장에서 3미터 아래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발목 아래 종골이 12조각이 나는 부상을 입었지만 그만하길 천만 다행이다 싶더라구요. 신께서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살라고 나를 지켜주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비참하고 처절한 나날 중에 내게도 기쁨과 행복의 날이 있었으니 막노동으로 번 일당을 아이들 엄마에게 입금해 주는 날이 그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 달을 입원하고 나니 막일이 두려워졌습니다. 다시 동사무소를 찾아가 구직 신청을 했습니다. 이번엔 시청 공무직을 응시했습니다. 일주일 후 최종 합격자 명단에 내 응시 번호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가슴 벅찬 감동으로 기쁨의 눈물이 온 몸을 타고 흐르며 전율이 일었습니다. 인생의 반전은 최악의 상황에서 일어나는가 봅니다. 내 삶에 극적인 대반전이 일어난 것입니다.
저는 현재 용인중앙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틈틈이 책을 읽으며 마음과 영혼을 키워가고 있지요. 신아연 작가님이 쓰신 글로 저는 위로받고 치유되어 갑니다. 작가님은 세상 사람들과 달리 저를 인정해 주시며 저의 보잘 것 없는 삶을 빛나게 해 주시지요.
저는 고통과 고난 중에도 잡초 같은 근성으로 버텼습니다. 살아갈 이유와 존재 가치를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 아빠로서의 책임감이 큰 작용을 했습니다. 저는 제가 받은 도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초록우산 어린이 재단'과 '사랑의 열매'에 기부하며 나눔의 삶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과도 자유롭게 만납니다.
고난이라는 학교에서 깨닫고 성장하며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워 살아남았습니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어오르듯 제 삶도 연꽃을 닮았습니다. 이 글은 훗날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 보여주려고 합니다.
이별하기 전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적게 가져도 멋지게 살고, 순간순간 행복하며 어머니를,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고 합니다. 오는 어린이 날에는 아이들을 만나 옷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신나게 놀아 주려고 합니다. 또한 어버이날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나들이 가려고 합니다. 5월 가정의 달에 제가 할 일이 참 많아서 좋습니다.
세번 째 조력자살 한국인과 동행한 4박5일 체험기 / 2022년 8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