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보듬 도덕경(67/1장)
주말, 휴일 잘 보내셨습니까. 저는 지난 토요일에 천마산 기도원을 다녀왔습니다. 난생 처음 산 기도를 갔네요, 제가. 사진 속 자리에 앉아 기도하는데, 로마서 8장 1, 2절에서 울음이 터지면서 마음의 암 덩어리가 녹아 내렸습니다. 일생 죄와 죄의식에 얽매여 살던 제게 '무죄 선고'가 내려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병 들어 정신과를 들락거리고 심리 상담도 받았지만
( 우리 독자 중에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 심리 상담사도 계시는데, 미안합니다)
그러다 '미투'도 당하고, 돈만 없앴지 불안정은 여전했고, 그렇게 일생 고통받던 저를, 60년 병자를 하나님은 6개월 만에 고쳐주셨습니다. 그것도 아무 값없이.
이제 제게는 믿음이라는 수정란이 예수라는 자궁에 잘 착상되어 더는 유산할 위험이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가지가 나무에 잘 붙어있으면 저절로 열매를 맺는다 하신 것처럼, '신앙적 유산끼'가 사라진 저도 안전하고 슬기로운 임신 생활을 구가하며 앞으로 맺게 될 열매를 기대합니다.
하재열 작가의 '심상'
제 독자 중 한 분은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것은 절대 자기 삶에 들여놓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본인은 결코 기독교인이 될 수 없고, 대신 불교와 도덕경을 지침으로 살아간다고 하시네요. 그런데 불교는 고도의 심리 철학이자 관계 철학이니 그렇다치고, 도덕경도 이성으로 수용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도덕경 첫장에서부터 누누이 말하지만 도(道)는 이성적 파악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다고 했지요. '도란 이런 것이다' 라고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지요. 사이비 도는 될지언정.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인간의 언어로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영'이시죠. 언어로는 만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성으로는 다가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듯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기는 성경이나 도덕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67장 첫 구절 또한 도는 '인간 사고 너머'의 그 무엇이라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선 함께 읽어볼까요?
하재열
세상 사람들은 나의 도가 너무 커서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너무 큰 존재라 그런 것 같은데,
만약 그렇게 보였다면
오래 전에 별 것 아닌 것이 되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그것을 잘 보존하고 있다
첫째는 자애요,
둘째는 검약이요,
셋째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자애롭기에 용감할 수 있고
검약하기에 널리 베풀 수 있고
나서지 않기에
온 세상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자애 없이 용감하려 하고
검약 없이 베풀려 하고
뒤에 서려는 덕성 없이 나서려고만 하면
죽음의 길이 되고 만다.
자애로움을 가지고 싸우면 이기고
자애로움을 가지고 지키면 견고하다
하늘이 장차 누군가를 구하려 한다면
자애로움으로 그를 지켜줄 것이다.
도란 너무 커서 사람의 힘으로 우물딱 쭈물딱할 수 있는 게 아니라잖아요.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도, 그 까짓 것 별 거 아니네"하고 오래 전에 폐기되었을 거라 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나의 도가 너무 커서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 같다고 한다
너무 큰 존재라 그런 것 같은데,
만약 그렇게 보였다면
오래 전에 별 것 아닌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이성 너머의 것을 어떻게 접촉할 수 있는가가 관건인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성으로는 파악되지 않지만, 햇볕이나 공기, 물처럼 우리 삶에 근원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무지막지하게 중요한 존재가 있으니 그 존재를 어떻게 해서든 감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 감지법', 내일 말씀드리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