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PT(4)
"제가 육의 혼밥을 하러 이따금 가는 서울대 부근 중국집 간판에는 '요리에 혼을 담다'라고 씌여있습니다. '요리에 영을 담다'라고는 하지 않고. '예술혼'이란 말은 있어도 '예술영'이란 말은 없죠. 왜 그럴까요? "
지난 시간에 이렇게 말했지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 자체는 표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리에도, 예술에도, 삶에도 영을 직접적으로, 가시적으로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오감과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기에 감각 대상과 이해 대상이 아닙니다.
영을 보려고 들으려고 냄새맡으려고 만지려고 애쓰실 필요도 없고, 머리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이해하려고 애쓰실 필요도 없어요. 아니 애 쓰실 필요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럴수록 영을 내 안에 들여놓는 데 방해가 됩니다. 왜 그런지는 다음에 다시 말씀드리죠.
독자 한 분이 일전에 '나는 합리적으로 납득되지 않으면 절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신앙인이 되기에 불가능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분뿐 아니라 많은 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실 테지요. 그런데 이분 말에는 모순이 있습니다.
'합리적으로 납득되는 것'과 '믿는 것'은 상반되는 개념이니까요. 합리적으로 납득됐으면 그걸로 끝나야지, 거기에 왜 믿는 행위가 추가되어야 합니까.
© OpenClipart-Vectors, 출처 Pixabay
'밥을 먹으면 똥이 나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지 않잖아요. 합리적인 일이니까요. '나는 밥을 먹으면 똥이 나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 사실을 또한 믿는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때의 '믿음'은 합리적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지요. 그 합리성을, 그 원리를 믿는 거지요.
하지만 누군가가 '똥을 먹었는데 밥이 나왔다'고 한다면 일단 믿어야겠지요.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 내용이 아니니까요(아침부터 지저분한 소리를 해서 미안합니다. 잠이 덜깨서 삼빡한 사례가 생각나질 않네요.ㅎ).
그러니 '합리적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말은 그 자체로 비논리적인 거지요. '합리와 믿음'은 함께 갈 수 없는 개념이니까요. 지금 그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그렇다면 또 질문하시겠지요. "육적으로도, 혼적으로도 접할 수 없다면 영적인 것이 왜 필요한가?"라고.
"나도 모르는 스위스 계좌에 억만 금이 들어있다 한들 죽을 때까지 1원도 찾아쓸 수 없다면 그 돈은 없는 것과 다를 게 뭔가?"라고. 그런데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스위스 계좌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이것만은 아셔야 합니다.
혼은 '이해를 통한 앎'을, 영은 '믿음을 통한 앎'을 가져온다는 것을. 혼적 대상은 이성으로, 영적 대상은 믿음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처럼.
혼적 파악 대상은 이 세상의 모든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일. 그렇다면 믿음으로 파악되는 대상은 무엇일까요? 스위스 금고를 여는 열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 주에 계속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