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철학을, 철학에 일상을 12
마치 교환이라도 하듯이 내 곁에 한 생명이 오고 한 생명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디에선가는 태어나고 죽어가지만, 아주 가까이에서 생긴 일이라 삶과 죽음이 한 쌍의 일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이별을 맞이한 사랑 앞에 망연자실했던 일, 그리고는 어느 새 새로운 사랑을 맞이했던 일을 떠올려 본다면 만남과 헤어짐,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 손바닥과 손등처럼 함께 있고, 함께 오간다는 걸 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나는 새해가 될 때마다 죽음 생각이 나곤했는데, 남들이 들으면 재수 없다 할까 봐 입 밖에 내어 말해 본 적은 없다. 그러다 최근 암 통보를 받은 이어령 교수의 말을 통해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중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정월 초하루에, 그 좋은 새해 첫날에 왜 죽음에 대한 노래를 부르겠나. 죽음을 염두에 둘 때 우리의 삶이 더 농밀해지기 때문이다.”
그랬던 것이다. 한 해를 더 잘 살고자, 더 진하게 살고자, 더 온전히 살고자 나의 무의식이 새해만 되면 죽음을 상기했던 것이다.
“사람 만날 때도 그 사람을 내일 만날 수 있다, 모레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농밀하지 않다. 그런데 제자들 이렇게 보면 또 만날 수 있을까. 계절이 바뀌고 눈이 내리면 내년에 또 볼 수 있을까. 저 꽃을 또 볼 수 있을까. 그럴 때 비로소 꽃이 보이고, 금방 녹아 없어질 눈들이 내 가슴으로 들어온다. ‘너는 캔서(암)야. 너에게는 내일이 없어. 너에게는 오늘이 전부야’라는 걸 알았을 때 역설적으로 말해서 가장 농밀하게 사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나쁜 일만은 없다.” 고 이교수는 말한다.
삶이 떠나지 않게 하려면 죽음을 붙잡아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게 농밀히 일생을 살다가 이제 죽음 편에 아주 가까이 선 지인이 있다. 죽은 이는 사라진 게 아니라 안 보이는 것이다. 삶의 편에서 보니 안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사랑하는 이를 곧 떠나보내야 하는 가족들을 위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