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PT(8)
하나님이 컴느님을 컨트롤하고 계시는 느낌의 아침.^^ 그러니까 새벽에 글을 먼저 쓰지 말고 나를 먼저 만나라는 새 질서를 부여하시기 위한.
한국생활 새 10년의 8월 들어, 오늘까지 5일 간 저는 하루를 시작하며 성경을 가장 먼저 만나고 있습니다. 이어서 기도합니다. 컴퓨터가 안 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간섭이 아닐까 싶은 거지요. 나부터 만나라는. 영성으로 하루를 시작하라는.
그 전 10년은 눈 뜨자마자 책상 앞으로 기어가 글을 썼지요. 수행하듯이 같은 시간, 같은 자세로 글을 쓰다보면 하루를 살아갈 힘을 얻곤 했으니까요. 여러분들 중에는 제 글을 진짜 좋아하고 아침마다 기다리는 분들도 한 다섯 분은 계시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송구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을 위한 글이 아니라 나 살자고 쓰는 글이라서요.
여러분 중 대부분은 제가 언제 글을 쓰는지, 언제 보내는지 관심이 없다는 걸 압니다. 그게 정상이지요. 남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게. "그렇게 잘 알면서 왜 꼭 보내야 하느냐, 너 혼자 쓰고 말지."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게 꼭 그렇지는 않더라는 거지요.
사람은 함께 사는 존재라서 그렇습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남에게 인정받아야 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타인 속에서 가지런해 집니다. 타인이 없이는 나도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줘야 합니다. 제가 막 살면 누군가, 단 몇 명은 막 삽니다(부모 사는대로 자식이 따라 살지 않습니까). 그 숫자가 많아질수록 나도 모르게 책임이 생겨납니다. 세련된 표현으로 영향력이라고 하지요.
원했든 안 원했든 저도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포털에 제가 쓴 글이 떠다니고, 낯 모르는 사람들의 블로그나 카페에 옮겨져 있고, 심지어 매체에 무단 도용도 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나 좋자고 쓴 글'이라고만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음과 생각을 다잡아야 겠다는 각오가 새롭습니다. 차제에 컴퓨터가 브레이크를 걸었고, 저는 내면의 질서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죽을 지경에 이르러야 바뀝니다. 그래서 속된 말로 사람이 바뀌면 죽을 때가 되었다고 하는 거지요. 죽어도 안 바뀌는 게 사람이라고도 하고요. 이때의 '사람'이란 '자아'를 의미하지요. 내가 평생 붙잡고 살아 온 '자존심의 화신인 나'를 말하지요. 그 자아는 나이가 들수록 강화되어 갑니다. 안 그렇겠습니까. 평생 그걸로만 살았으니까요. 그 자아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사람이 바뀌었다고 하는 겁니다.
저는 지난 몇 년 간 죽을만큼 힘든 일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이 바뀝디다. 정확히는 바뀌려고 미동을 합디다. 자아가 죽어야 문제가 풀릴 테니까요. '자아 죽이기'가 곧 영성입니다. '자아 살리기'가 혼성이라면.
혼적 삶이 물러나면 영적 삶이 전면에 섭니다. 영적 삶이 진짜고 혼적 삶은 가짜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자아가 살아있되 질서 속에서 살아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럴 때 자아가 비로소 제 역할을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대고마고 나대는 게 아니라 영적 컨트롤을 받으며 표현된다는 뜻입니다.
육혼영의 질서가 그렇게 성립되는 겁니다. 육은 혼의 컨트롤을 받아야 합니다. "야식 먹지마. 술 그만 마셔. 그만 일하고 잠자리에 들어. 다른 사람 때리거나 죽이지 마. 성추행 하지마."라는 혼의 음성을 무시하고 육이 제멋대로 할 때 몸에 병이 나고 사고를 치게 되지요.
"네 고집대로 하지마. 다른 사람 판단, 정죄하지마. 자랑질, 잘난 척 좀 그만 해. 네 계획대로 일이 되는 게 아니야."라는 영의 권면을 듣지 못할 때 혼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육혼영의 주도권을 영이 쥐고 있습니다. 영만 중요하고 혼과 육은 필요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질서가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이 망가지면 혼도 육도 무너지는 거지요.
저는 지난 10년 간 들입다 혼을 훈련시켰던 거지요. 혼을 강화하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지요. 따라서 육적으로 큰 일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삶의 균형 면에서는 여전히 찌그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한 결과지요. 영적 삶을 무시했으니까요.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