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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는 나는 누구, 죽여지는 나는 누구?

왕따 장자(17)

by 신아연


오늘 나를 장례 치르는 날이지요. 장례를 '치르는' 나는 누구며, 장례를 '당하는' 나는 누구일까요? '죽이는 나'는 누구며, '죽임을 당하는' 나는 누구냔 말이죠. 그리고 왜, 무엇때문에 죽어야 하나요?



우선 글자를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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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oduma, 출처 Pixabay


'오상아(吾喪我)'라고 할 때 '오(吾)'와 '아(我)'의 차이를 아셔야 합니다. '오'는 본래의 나, 순수한 본성의 나입니다. 흔히 백지 상태로 태어난다고 할 때의 나인 거지요.



이제 이 백지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합니다. 그 그림은 가정과 사회에서 거의 일방적으로 주입됩니다. 이른바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죠. 동시에 이런저런 때가 탑니다.



집착, 편견, 욕망, 신념, 가치관 등이 아로새겨지면서 점차점차 '아(我)'로서의 내가 만들어져 갑니다. 성격이 형성되어 갑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나라는 의식(자의식)이 자리잡습니다.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아(我)'는 판단, 정죄, 고집, 비교, 경쟁, 시기, 질투, 화, 분노, 자존심, 열등감, 우월감, 인정욕구 등으로 본래의 나인 '오(吾)'를 시달리게 하고 얼룩지게 하면서 급기야 망가뜨립니다.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만들어진 나에, 형성되어진 나에 집착,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게 나라고 믿고, 너라고 판단하며 평생 사는 거지요. 나는 이런 사람이야, 쟤는 저런 사람이야 하고 말입니다. 선천적 나, 순수 본성의 나와 너는 다 잊혀지고 묻혀집니다. 태어남과 동시에 에덴동산을 잃어가는 거지요.



장자는 그 '아(我)'를 장사지내자고 합니다. 그래야 '오(吾)'가 다시 살아난다면서. 성경에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는 것처럼.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고 하는 것처럼.



기미 독립선언문은 '오등(吾等)은 자(玆)에'로 시작하지요. '아등(我等)은..'으로 시작하지 않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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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rolynabooth, 출처 Pixabay


오늘은 죽고 죽이는 '아(我)'와 '오(吾)'를 구분해 보았습니다. 살아야 할 것은 오(吾), 죽어야 할 것은 아(我)인 거지요.



왜 죽어야 할까요? 아(我)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기에 오(吾)를 회복하여 에덴동산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서입니다.



아(我)로 잃었던 덕을 오(吾)로 되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일 계속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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