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에 미친 여자11
이 글은 6월 1일에 쓴 글입니다.
저는 내일 서울신문과 인터뷰를 합니다. 제가 호주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준 인터뷰라 서울신문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입니다.
이번에도 저의 스위스 안락사 동행 체험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번 인터뷰는 매우 독특하게 진행될 것 같습니다. 신문에 기사가 나올 때까지 비밀 유지를 해 달라고 해서 밝히지는 못하지만 서울신문의 기획력이 탁월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이 나온 지가 1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크리스천이 된 이후, 남은 생은 크리스천 작가로 살기로 자리매김한 이후의 첫 책이기에 하나님께서 홍보 배급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현재 땅에서 가장 주목 받는 이슈일뿐만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 이슈인만큼 하늘에서 직접 컨트롤하기 위해 저를 통해 글로 쓰게 하신 하나님의 탁월한 기획력에 감탄합니다.
호주에서 저는 돌아가신 분이 사시던 동네와 직장이 있던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분은 시드니에 거주하셨드랬지요. 집은 싱가포르 같은 분위기가 나는 시드니의 깔끔한 부촌 로즈에, 일터는 시드니 대표 한인타운인 스트라스필드에 있었습니다.
고인과 가장 가까운 친구분과 우연히 연결되어 오랜 시간 통화도 했습니다. 고인은 이른바 삼총사를 이뤄 친분을 나누셨다고 해요. 그런데 삼총사 중 그 누구도, 그러니까 나머지 이총사는 그분이 안락사를 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하시더라고요.
"늘 만났던 우리가 아는 한 그 사람은 결코 그런 선택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면서, 저한테 정말 죽음을 목격했냐고, 죽은 걸 직접 확인했냐고 거듭 물으셨을 정도였지요. 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여운과 함께.
2021년 8월, 스위스에서 안락사 하신 고인이 살던 동네
저는 거꾸로 그분은 그런 말씀을 주변에 하실 분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친하게 지냈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제가 아는 그분은 세상에, 타인에 그런 식으로 자신을 노출할 분이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안락사로 돌아가시기 전, 저하고 대화를 꽤 많이 했으니까요.
저는 그분의 성향을 파악했고, 그 성향이란 인문적 사고에 과몰입되어 있었던 것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중심성이 지나치게 강했던 분이란 뜻이지요.
고인의 직장이 있었던 시드니 한인타운 스트라스필드
저는 예수님을 만난 후 '나'로 시작하는 말과 표현을 가급적, 의식적으로 줄이려 하고,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부터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렇기에 '내'가 무엇을 한다, 하겠다, 할 것"이란 생각과 의지를 동여매고 작동시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먼저 물어보고 상의합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니 내 마음가는대로, 내 결정대로 하는 게 아니라 주인의 마음, 주인의 결정을 따라야 하니까요.
그게 바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는 말의 뜻이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그런데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택하신 분은 인생의 주인이 본인 자신이었던 거지요.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삶의 모든 결정, 심지어 죽음까지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인문적 사고 방식의 소유자였던 거지요.
'내 인생의 주인은 나', 신물나게 들어온 소리입니다. 그 구호는 인본주의, 인문학의 핵심으로, 태어나면서부터 주입되어 왔으니까요. 뱃속 태아의 태반처럼, 탯줄처럼 그것 놓치면 죽는 줄 아는, 우리 모두는 그렇게 '인문 귀신'에 씌여 있지요.
저 또한 그렇게 60년을 살아온 1인입니다. 그랬던 제가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로 주인 자리를 바꿔버리니 60년간 괴롭힘 당하던 일이 2주 만에 사라졌습니다. 영성의 2주가 지성의 60년을 완전 무화시켰던 것이죠.
어제 표현대로 하자면 제 인생을 예수프로그램으로 바꿔 깔아 작동시킨 후 생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