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미녀의 맛깔난 예수(50)
제가 노미녀(노자에 미친 여자)에서 예미녀(예수에 미친 여자)로 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노자에게 없는 것이 예수에게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자 이야기와 예수 이야기는 겹칩니다. 노자가 한 말을 예수가 했고, 예수가 한 말을 노자가 했습니다.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도덕경을 풀이하는 경우가 그래서 많습니다.
저도 예수 믿은 후론 도덕경 연재 후반부에 성경 말씀과 노자 말씀을 선 긋기 했지요. 두 분 말씀이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것이 많았던 것이죠.
만난 적 없는 두 사람이 어떻게 같은 말을 했을까요?
그렇죠. 진리를 말하기에 그렇지요. 어떤 진리? 비움의 진리! 낮아짐의 진리! 아가페 사랑과 무위의 사랑!
그럼에도 제가 노자에서 예수로 '갈아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와의 '인격적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노자도 예수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만나야 되는 분들이지만 그럼에도 노자와는 인격적 만남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건 제 잘못이 아니라 노자가 처음부터 그렇게 우리의 만남에 선을 그었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던 거죠.
즉, '천도무친(天道無親)'이라고 아예 못 박았으니까요. 하늘의 도는 특별히 어떤 사람과 친한 일도 없고, 누구를 편애하는 일도 없다면서. 그래놓곤 '확인사살'까지 합니다.
즉, 추구(芻狗; 짚으로 만든 개, 풀강아지)를 그 비유로 들지요. 옛날에는 제사를 지낼 때 제물용으로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비단 옷 등을 입혀 썼다고 하네요. 제물에는 풀로 만든 개도 있었던 모양이에요. 추구는 제사를 지낼 때는 소중하게 다루지만 제사를 마치면 그대로 버리거나 불에 태워 없앴다고 하지요. 선거일 다음날 후보자들 사진처럼.
도는 사람을 대하기를 제사 지낸 후의 추구 대하듯 한다니 저도 더는 미련없이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제가 동생으로 아끼는 같은 교회 교인이, 어차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냐고, 나만 사랑하는 것도 아니지 않냐고. 그래서 약간 실망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노자가 말한 천도무친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께 그런 요소가 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도=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하나님=예수님'이라고 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격성이 '훅~'하고 들어오는 거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니까요. 내 속에 거주하시고 나와 동거하시니까요. 예수님은 신랑이고 나는 그의 신부니까요.
다른 말로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뜻입니다. 천도무친이 아니라 기가 막힌 '천도유친'인 거죠!
게다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기까지 하셨으니!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냐고요? 왜는 왜예요? 하나님과 나를 '직빵으로' 연결시켜 주시기 위해서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16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11장 25, 26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