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미녀의 맛깔난 예수(54)
어떤 큰 교회에서 제게 간증 요청을 할 수도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제 삶에 무슨 간증 거리가 있다고...
결혼 생활 25년 동안 매 맞는 아내로 살다 견디다 못해 맨몸뚱이로 집 나왔다는 간증? 그리곤 매우 매우 드물게 전업작가로 살고 있다는 간증? 한국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스위스 안락사 현장을 보고 왔다는 간증? 급기야 예미녀가 되었다는 간증?
오매불망 전남편도 회개하고 예수 믿게 되었다면 모를까, 남들처럼 드라마틱한 뭔가가 하나도 없는데 간증은 무슨...
그런데 말입니다. 이쪽 경계에서 저쪽 경계로 넘어가는 순간마다 대나무처럼 마디가 생겨나더란 거죠. 그런데 그 마디가 성숙의 눈금이더라는 거죠. 그리고 마디가 생기는 그 순간에는 깜빡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는 거죠.
통짜로 죽지는 못해도 마디마디 쉬어가면서 죽더라는 거죠. 여기서 여기까지만큼은 확실히 죽었다는 표식으로 눈금이 쫙 그어지고요.
매 맞는 아내에서 매 안 맞는 여자로 넘어오는 그 경계에 죽음의 간극이 있었고, 먹고 살려면 글을 써야 한다는, 생존 본능 앞에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먼저 도사리고 있었고, 안락사 하려는 사람과 죽음의 강을 함께 건넌 강렬한 동행 끝에 기진맥진 삶의 언덕으로 다시 오르게 된 체험이 있었습니다.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바로 이겁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게 아니라 죽는 만큼 성숙해진다는. 아픈 정도 갖고는 궁극적 성숙이 안 된다는.
우리는 지금 어떻게 마음을 비우고 그 마음에 성령의 불길이, 물길이 쏟아져 들어오게 할지를 나누고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진리의 영이라고 했지요. 내주하시는 예수님이라고 했지요. 성령이 내 마음에 계시면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거지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20절
우리가 우리 마음을 비울 수만 있으면, 버릴 수만 있으면 찌질한 내 삶과 영원히 굿바이할 수 있는 건데요, 이게 안 된단 말이죠. 근데요, 비우고 버릴 게 아니라 아예 죽으면 됩니다. 아니 죽어야 됩니다.
저는 예수 믿고 난 후(처음부터 된 건 아니고 점차 점차)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위 뚜껑이 열린다거나, 쪽팔린다거나, 멘붕이 오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죽었으니까요. 죽은 사람이 무슨 화가 나고, 수치스럽고, 자존심 상합니까. 죽었는데. 이미 시첸데.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누구를 만나도 자유롭지요. 대인관계에 겁이 안 나죠. 죽은 사람이 산 사람 대하기니까요. 상대는 산 사람이니까 생각도 많고 말도 많아요. 감정도 성질도 시퍼렇고요. 그런데 저는 죽었으니까 제 생각, 제 감정, 제 판단이 없어요. 국으로 가만히 있는 거죠, 뭐.
진짜냐? 아무려면 신아연이 무슨 성인군자도 아니고, 내가 아는 그 여자 맞아? 내 친구 맞아? 내 동생 맞아? 울 엄마 맞아? 그럴 리가. 하면서 콧방귀를 껴대도 가만히 있습니다. 죽었으니까요. ^^
그러면 또 물으시겠지요. 나도 죽고 싶다고. 예미녀는 어떻게 죽을 수 있었냐고?
그 전에, 내 안에서 진정 죽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요. '죽어야 할 나와, 그 죽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구분 말이죠.
내일 계속하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