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미녀의 맛깔난 예수(64)
횡단보도 앞 신호대기에 서서 버스가 두른 광고문안에 시선을 줍니다.
복권이 사랑이라는.
복권 대신 '복음'을 넣어 가만 말해 봅니다.
복음의 다른 이름, 사랑입니다
이어 성경말씀을 떠올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복음 중에 이보다 더한 복음이 없겠지요. 사랑 중에 이보다 더한 사랑이 없겠고요. 사람을 살리는 것 중에 사랑만한 것이 없고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1년 365일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두려운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있는 자리에서 한발 떼는 것도 두려워지죠.
두려움의 뿌리는 죽음입니다. 이런저런 두려움을 캐고 들어가면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의식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거지요.
두려움은 삶을 갉아먹는 독입니다. 그야말로 죽음입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독이 있는 곳에 해독제가 있다는 것이죠.
두려움이란 독의 해독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죽음을 초월합니다.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 손잡이입니다.
그렇다면 영생은 또 무엇인가요? 기독교에 대해 흔히 하는 오해가 "하나님을 믿으면 죽어도 안 죽는다더라, 계속해서 산다더라, 말이 되냐?"는 건데요.
말이 됩니다. 우리는 자꾸 이 몸뚱이 삶을 놓고 죽네 사네 하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을 몸뚱이 삶의 연속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러니 황당하게 들릴 밖에요.
하나님을 믿을 때 안 죽는 나는 몸뚱이 나, 다른 말로 자아, 에고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나, 참나, 때묻지 않은 순수한 나를 의미하는 거지요. 다른 말로 영적인 나란 말이지요. 영으로의 나는 죽지 않지요.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하니까요.
다석 류영모 선생은 이렇게 비유합니다.
사람의 몸뚱이라는 것은 벗어버릴 옷이지 별 게 아니다. 육체는 옷과 같다. 옷은 마침내 벗을 것이니 속옷, 겉옷 아무리 겹겹이 입었더라도 벗어버릴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결국 인간의 주인은 얼, 영혼이다. 사람에게 영원 불멸하는 것은 얼뿐이다. 옷은 아무리 화려하고 찬란해도 그것은 살(육)옷이요, 몸옷이다. 70, 80살이 되면 마침내 벗어버리고 만다. 그런 후 드러나는 것은 얼(영)뿐이다.
그 본래의 나, 영으로의 나를 직통으로 만나는 길이 사랑이며, 성경은, 복음은 그 사랑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