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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뛰고 저리 뛰던 '메뚜기 통신원'

내 안에 글 있다 7

by 신아연

고려아연 현지 법인 선메탈 사 주재원 부인들과 함께 했던 타운스빌 생활은 군대에 버금가는 조직생활이었다. 그 가운데 나는 어리바리한 신참 중의 신참. 지난 번에 말했듯이 나 빼놓고 나머지는 몸에 밴 단체생활에 아무런 거부감도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타국 생활에서 오는 긴장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서로의 결속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기회로 여기는 것 같았다.


문제 삼을 것이 없으면 애초에 아무 것도 문제가 없는 법이다. 노심초사,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나의 병통이니, 그래서 그 병증을 어떻게든 경감시키기 위해 시드니의 동포 신문사와 어찌어찌 줄을 다시 이어 나의 절박한 숨통을 트이게 했던 것이지, 애초에 이렇다할 결핍감이나 내적 갈등이 없다면 그것처럼 자유롭고 행복한 일도 없다. 남들은 행복하게 외국 경험을 즐기고 있는데, 나만 안 행복했던 것 뿐이었다는 말이다. 지금 돌이켜 볼 때 내가 오해를 했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나 싶다. 나한테는 대단한 일이지만 남들에겐 아무 짝에도 의미가 없거나 관심도 없는 일일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때는 그게 잘 안 됐다. 남들 안 가진 무슨 대단한 것을 나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혼자 쉬쉬하고 감추며 살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우습다.


'배갯머리 송사'라고 혹여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옆집 부인들에게 '들킨다면' 남편의 직장 생활에 해가 미치지 않을까 우려가 되었던 것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진원 엄마 지가 얼마나 잘나서, 혼자 글 쓴다고 난리야." 라고 부인들이 남편들에게 속닥거리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중간 간부인 울 남편에게 '윗 선'으로부터의 불이익이라도 온다면? 그런 것이 염려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냐고? 낮에는 그 전보다 더 열심히 놀았다. 내가 글을 쓴다는 것을 감쪽같이 감추기 위해, 부인들의 낮모임에 전보다 더, 전처럼 변함없이 꼬박꼬박 참석했다.


그 무렵 나의 글쓰기는 일취월장하여 동포신문에 칼럼을 연재한 지 채 1년도 안 되어 부산일보, 내일신문, 오마이 뉴스, 여성 조선, 엠비씨, 케이비에스, 이비에스 방송사 등 한국의 여러 매체에 호주 통신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점차 벌이도 쏠쏠해져서 모았다가 한국에 갈 때 경비에 보태거나, 이따금 친정 엄마의 용돈으로 드리기도 했다.


한국과 호주는 시차가 여름에는 1시간, 겨울에는 2시간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것조차 내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가령 각 방송사는 해외 통신원을 두고 있는데, 유럽이나 미국 등에는 시차가 큰데다 대부분의 국가와의 관계에서 밤낮이 바뀌기 일쑤라 방송 사고가 날 수 있는 위험이 늘 존재한다. 심지어 그날 방송 예정인 해당 국가 통신원이 순서를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다. 그럴 때 호주 통신원인 나는 '땜빵용'으로 적합하기 이루 말할 수 없어서 각 방송사 작가들(이 사람들은 방송용 원고만 쓰는 것이 아니라 취재원 섭외 등 방송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맡는다) 사이에서 비상용 리스트에 올라가 있었지 싶다.


호주편 방송일이 아닌데 느닷없이 전화가 와서 '방송 5분 전인데, 무슨 일인지 독일 통신원이 연결이 안 된다, 호주 이야기를 대신 좀 해 줄 수 없느냐. 아니 우리 살리는 셈치고 무조건 해 달라.' 이런 식이었던 것이다. 방송 펑크가 나는 것은 그 사람들에겐 곧 죽음이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껏 사람을 여럿 살렸다. 더불어 통신원 연결에 실패하여 징계를 먹거나 '모가지를 당할' 뻔한(그만한 일로 모가지를 당하는진 모르지만)방송 작가들을 살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해야겠지.


통신원 활동은 모두 생방송으로 이뤄지지만 내 순서가 아닌 날 생방송을 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진땀나는 일이다.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어느 날인가 나는 원고도 없이 즉석으로 당시 일어났던 호주의 인종 폭동에 대해 약 5~10분간 '썰'로 단련된 혓바닥을 놀려댄 적이 있다. 엠비씨와 방송이 끝나면 이비에스의 방송이 바로 시작되는 날도 있었다. 통신원 활동은 원칙적으로 한 방송사와 계약이 되어야 한다는 건 내 쪽의 상식이고, 맡아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수월한 길을 찾게 되니 신뢰할 만한 통신원이 있다 싶으면 공동으로 '써 먹는' 게 관례였다. 제 철을 맞은 메뚜기처럼 그 때 나는 이 신문, 저 신문, 이 방송사, 저 방송사를 컴퓨터나 전화기 앞에 '가만히 앉아서 뛰어다니느라' 바빴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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