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수업 3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독일 어느 시인은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입니다. 저마다 인간으로 깊어지면서 독특한 향으로 익어가는 중이니까요.
예술로의 인간이 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죽음이 아닐까요? 인간을 궁극적으로 인간되게 하는 것, 그것이 죽음이 갖는 의미입니다. 죽음은 삶의 정직한 마무리라는 점에서 화룡점정과도 같습니다. 죽음 앞에 정직할 수 없다면 정직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잃는 것일테죠.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죽음은 삶을 정직으로 결산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거짓됨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내가 죽는다고 할 때 무엇이 마음에 가장 걸리는가에 있다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간다면 거짓을 안고가게 되는 거라고. 누군가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도저히 풀 시간이 없다며 절망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시간이 있다 해도 자신의 힘으로는 풀 가망이 없다고 더더욱 절망할 것입니다.
죽음은 이 모든 거짓에서 우리를 놓여나게 할 것입니다. 거짓이란 말이 거슬린다고요?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냐고요? 그렇다면 인간으로서의 한계라고 고쳐 말하지요. 살아오면서 평생 끌탕을 해온 일이 있을 것입니다. 제 나이 언저리, 60년 정도를 살아보면 그것이 또렷하게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김보선 / one evenig around
선불교의 조사(祖師) 마조선사에 관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좌선수행에 빠진 마조에게 스승 회양이 다가와서는 무엇을 위해 그리 열심인지 물었답니다.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마조가 이렇게 대답하자 스승은 기왓장을 가져와 마조 옆에서 갈기 시작했습니다. "기와를 갈아서 뭘 하시려고요?"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아니 기왓장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됩니까?" 스승 회양이 물끄러미 마조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지요. " 기왓장을 간다고 해서 거울이 될 수 없듯이 좌선으로는 부처가 될 수 없네."
우리는 어쩌면 평생 기와를 갈아 거울로 만들려는 헛짓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좌선으로 답을 찾겠다는 마조와 같이 평생을 두고 끌탕하고 있는 일에 의지적으로 덤벼왔을지도요. 저는 '기와 갈이'와 좌선을 동시에 해 온 것 같습니다. 제게 글쓰기는 좌선과 같으니까요. 그러나 그 모든 괴로움은 날이 밝음과 동시에 또다시 저를 덮쳐오곤 합니다.
언젠가 닥칠 죽음만이 그것을 내려놓게 할 것입니다. 죽음 밖엔 답이 없어요. 엊저녁, 삶의 옷을 곧 벗게 될 독자와 오랜 시간 통화를 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경부선 열차에서 우연히 옆 자리에 앉게 된 사람들처럼. 그분은 저보다 먼저 내릴 예정이지요. '끌탕 보따리'는 그대로 가뿐히 둔 채. 저는 그분과 자주 대화를 합니다만, 무겁디 무거운 내 보따리를 내려다 보며, 곧 맞이할 죽음으로 인해 자유롭고 홀가분할 그 분에 대한 공감이 어제 비로소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