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어 환장한 나

신아연의 영혼의 맛집 886

by 신아연


어제는 우리 모두 죽고 싶어 환장한 날이었습니다. ^^




어제 제 글이 아시아 뉴스 플랫폼 '아시아엔'과 애틀랜타 어느 한인교회에 소개되고, 어떤 목사님은 제 글을 본인 글로 둔갑시킨 어이없는 일까지 했더라고요. 졸지에 도용을 당한 거죠.




모두들 그렇게 죽고 싶어 안달이면서 정작 왜 죽지 못할까요? 그렇게 죽음이 좋은데 왜 한 번에 확 죽지 못할까요? 어떤 독자도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날마다 죽는 것보다 한 번 제대로 죽고 그 안에 예수님께서 사시면 참 좋지 않을까요."라고. 그러면 좀 좋겠습니까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마태복음 26장 41절) 거죠. 그 정도로 자아가 질긴 거죠.




왜 나를 죽이지 못할까요? 왜 노상 헤어질 결심만 하지 정작 헤어지질 못할까요?




아 참, 어제 제 글, '헤어질 결심'을 영화 <헤어질 결심>의 남자 주인공 박해일 씨도 읽었다고 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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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간단합니다. 살만하니까 그렇습니다. 저처럼 안 죽고는 못 배길 일을 아직 겪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이 문제, 저 문제해도 어미된 여자가 자식 문제로 속앓이를 하는 것보다 더한 죽을 지경의 일은 없을 것입니다.




두 아들과의 20년 불화가 이번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완전히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보니 진즉에 죽었더라면, 죽어야 끝날 일인 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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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아(我)'라는 글자가 그렇게 생겨먹었습니다. 손에 창을 쥐고 있는 형상이죠. 아를 드러내는 순간 적수가 있을 수 밖에요. '나에는 반드시 너가 존재'하되 그 관계는 배타적이란 뜻이죠.




무아(無我)에 이를 때에만 너와 내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된 나를 '아(我)'와는 구분하여 '오(吾)'라고 하지요. 사전에도 '오'는 '나, 그대, 우리'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삼일 독립 선언문이 '아등은 자에' 가 아니라 '오등은 자에'로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장자는 '나는 나를 장례 치른다'는 뜻으로 '오상아(吾喪我)'라는 말을 했습니다. 죽이는 나(오吾)와 죽임 당하는 나(아我)!




'아我'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는 옛사람이자 날마다 죽어야 하는 나죠. 오상아 했을 때에만 '내 안에 너 있다'는 기막힌 영화 대사가 탄생할 수 있는 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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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나(아)는 도대체 언제 죽냐는 건데요, 저처럼 고생을 하면 죽습니다. 확실히 죽습니다. 그러면 새사람, 거듭난 사람, 오(吾)의 나가 삶의 전면에 떠오릅니다.




그 나가 '참나'입니다.




단언컨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개고생을 안 하면 절대 참나를 못 만납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 말하지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편 119편 7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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