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내 안에 글있다 9 (최종회)

by 신아연


호주 북부도시 타운스빌에서 쓴 내 글은 볏단처럼 차곡차곡 쌓여 드디어 2000년에는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내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글을 쓰는 것과, 그 글이 모여 책이 되는 것, 그 책이 팔려 나가는 것, 이 모든 것은 각각의 인연이 작용하는 거라고. 글을 쓴다고 모두들 책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책을 낸다고 해서 그 책이 잘 팔리는 운까지 따라 오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나의 인연은 첫 번째, 두 번째까지였지만, 지금껏 그렇지만, 나는 그것으로도 족하다.


돌이켜 보면 글에 관한 한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기쁘고 행복했던 것 같다. 마치 단 한 명의 관객 앞에서도 혼을 담아 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나는 글을 쓰는 그 자체를 즐기고 내 글에 대한 책임을 다했던 것 같다.


공자가 말한, 좋아함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처럼. 그렇지 않고서야 30년 가까이 쉼없이 글을 쓴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싶다. 오늘은 내 첫 책의 제목이 된 '글,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을 올려본다. 거의 20년 전 얘기라 지금과는 느낌이 다를 수도 있지만. 그리고 호주도 이제는 활동 시간이 사뭇 늦춰져서 그만큼 '타락한 천국'이지만. 그리고 한국을 두고도 재미있는 지옥이 아닌, 그야말로 생지옥, '헬조선'이란 격하고 살벌한 표현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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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한국에 다니러 갔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볼일이 늦어져 밤늦게 귀가를 서두르며 바삐 지하철을 타러갔다. 그런데 표를 사서 계단을 내려가 승강장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남편과 나는 동시에 본능적인 공포감을 느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인데도 러시아워를 무색하게 역내가 발 디딜 틈없이 미어지고 있었고, 잠시 후 굉음을 내며 당도한 지하철은 토하듯 꾸역꾸역 사람들을 쏟아내고는 게운 것을 다시 삼키듯 승객들을 태우고는 어둠 속으로 빨려들 듯 터널로 사라졌다. 도저히 탈 엄두가 안나 망설이며 기다리는 동안 같은 일이 몇 번 되풀이 됐지만 구내는 여전히 사람들로 붐볐고, 남편과 나는 일련의 사태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가 놀랐던 것은 단순히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정이 가까와오는 시간에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밖에 나와 있을 수 있는 한국 생활이 새삼스럽게 느껴진 탓이었다. 파김치가 되어 귀가를 서두르는 고단한 가장이 왜 없을까만, 젊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시간에 친구도 만나고 술도 마시고 춤도 추러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저녁 8시 무렵이면 일찌감치 불이 꺼지는 집도 있고 9시 반 쯤이면 대부분 숙면에 빠지는 호주의 밤 시간대와는 대조적으로, 야밤을 틈타 시작되는 도깨비 잔치처럼 은성스런 한국의 밤은 남편과 나를 호주 촌뜨기라고 조롱이라도 하는 듯했다.

어디 밤문화 뿐이랴.
호주에서 남편은, 사무실이 밀집해 있는 시내 중심가를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샐러리맨 군단이 가득 메우며 다양한 식성에 맞추어 식당으로 밀려드는 한국 직장인의 점심 문화를 그리워했다. 동료들과 때로는 오랜 만에 만난 친구와 보글보글 끓는 전골 냄비를 가운데 놓고 소주잔을 기울이는 한국의 직장 풍속도와, 혼자서 간이 의자에 앉아 말라빠진 빵조각과 사과 따위를 씹거나 콜라 캔을 들고 햄버거, 닭다리 등 패스트푸드를 뜯고 있는 호주 직장인들의 점심 문화를 비교하며 한국을 그리워하곤 했다.


남편은 또 팝콘 한 접시도 안주라고 그걸 가운데 놓고 맥주 잔을 홀짝이는 맹숭맹숭한 호주인들의 술자리에 마지못해 끼인 날은, 퇴근길 술 한잔에 거나하게 취해 마누라에게 응석을 부릴 수 있는 한국 남자들의 치기조차 부러워했다.

나는 나대로, 일껀 사람을 초대해 놓고 음식 한 가지씩 가지고 오라는 합리성이 지나쳐 본인이 마실 술이나 음료수는 직접 가지고 가는 것을 기본으로 여기는 호주 사람들을 이해하기까지 한참 동안 낯이 간지러웠다.
아예 부르지를 말던가, 일껀 오라고 해서 가보면 손님들마다 자기 아이스박스를 끼고 앉아 술병을 꺼냈다 넣었다하는 것이 내 눈엔 왜 그리도 다라와 보였던지....

호주 교민들끼리 하는 말로 '호주는 심심한 천국이요, 한국은 재밌는 지옥'이라는 말이 있다.
우스개소리지만 한국 사람의 입장에서 호주와 한국의 차이를 재미있게 표현한 말 중에 이보다 더 기발한 것이 있을까.
사회가 안정되어 사람이 제대로 대접받는 호주를 천국이라 하고, 사고와 비리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한국을 지옥에 견준 것까지는 우스개도 아니다.
그러나 천국은 천국인데 이방 문화에 낯선 우리에게는 '심심하다'는 말로, 지옥이라 할지라도 우리 정서에 맞춤하는 분위기를 '재미가 있다'는 말로 표현한 것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밤이면 포장마차도 기웃거리고 싶고 때로는 터놓고 질펀하게 개기고도 싶은 '재미있었던 지옥'에의 그리움과 향수를 '심심한 천국'에서는 도무지 달랠 길이 없다. 오죽하면 어떤 이는 좁은 골목길마다 수북수북하던 쓰레기조차 그립고 내 나라의 똥파리가 다 보고 싶다고 했을까.

불안하고 혼란스런 한국을 떠나기 위해 이민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중이 저 싫으면 절을 떠난다는 말이 있지만, 국민이 저 싫으면 제 나라도 떠나야 하는가 싶어 서글퍼진다.
올해도 우리 이웃에 한국서 온 새 이민자들이 생겨날 것이고 그들도 우리처럼 '천국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살면서 느낄 것이다. 이방의 천국은 소외되고 심심하다는 것과 내 나라가 '재밌는 천국'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을 ....(1999.12)

호주 이민생활 이야기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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